해적에서 카이사르까지
로저 데 플로르(Roger de Flor)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한때 해적이자 모험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이제 비잔틴 황제의 아들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와 한 상에 마주 앉아 공식 초청 손님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는 검으로 명예를 쟁취한 '카이사르' 칭호를 지닌 자였다. 점점 더 공세적으로 밀려오는 튀르크로부터 제국을 여러 차례 구해낸 대가였다.
1302년경, 튀르크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말을 달리면 단 하루 거리까지 다가선 상태였다. 로저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들의 발목을 잡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제국 내에서 자신의 권력이 끊임없이 커지고 있다고 확신했고, 실제로 사실이었다. 그에게 하사된 영지와 누리던 예우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를 위해, 미카엘의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 팔라이올로고스 역시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드리아노플에서 열린 그날 밤의 만찬은 로저 인생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그는 이 식탁에서 산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
5,500명의 정예 용병단, 카탈루냐 회사
로저 데 플로르는 5,500명으로 구성된 용병 부대 '카탈루냐 회사(Catalan Company)'의 지휘관이었다. 당대 가장 흉포하고 가장 숙련된 전사들이라 평가받던 무리였다. 그는 오직 금만을 숭배했고, 자신의 군대 가치를 잘 알았기에 언제나 더 많은 대가를 요구했다.

시칠리아에서 참전하던 전쟁이 끝나자 데 플로르는 다음 고용주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302년, 안드로니코스의 초청과 시칠리아 통치자의 권유에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건너가기로 합의한다. 당시 비잔틴은 소아시아를 오스만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던 중이었다.
이 강력한 군대는 실제로 튀르크를 소아시아 내륙 깊숙이, 오늘날 시리아 국경 부근까지 후퇴시켰다. 그는 필라델피아를 함락하며 거의 2만 명의 튀르크 병사를 몰살시켰고, 얼마 전 미카엘이 패배했던 마그네시아를 탈환했으며, 에페소스까지 점령했다.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에 맞설 때 승리를 거둔 몇 안 되는 원정 중 하나였다.
그의 공을 포상하기 위해 1303년 안드로니코스는 그에게 '메가스 두크(대공작)' 칭호를 내리고 왕족의 일원으로 정식 편입시켰으며, 조카인 불가리아 차르의 딸 마리아 아센을 아내로 주었다.
이 두려운 전사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수없이 퍼져나가 전설의 경계에 다다랐다. 곤봉으로 적의 투구를 한 번만 맞추면 뇌수가 터져 나온다느니, 그들의 도끼는 과녁을 놓치는 법이 없다느니, 화살 한 발로 말 한 마리를 통째로 꿰뚫을 수 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그것이다.
이 군대의 핵심은 알모가바르(Almogavar)였다. 당시 무슬림과 기독교 스페인의 경계 지대에서 살며 싸우던 강인한 자들로, 비잔틴의 국경 수호 전사인 아크리타이와 비슷한 존재였다. 비잔틴에 도착한 뒤에는 튀르크 기병 용병 3,000명까지 추가로 고용하기도 했다.
로저 데 플로르의 최대 승리는 철문(Iron Gate) 인근에서 일어났다. 8,000명의 전사를 이끌고 주로 옌니체리로 구성된 3만 튀르크군을 격파, 무려 1만 8천 명을 살육한 것이다. 이 압도적인 패배 이후 튀르크가 재기를 준비하는 데 여러 해가 걸렸고, 덕분에 흔들리던 제국은 숨 돌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배신의 만찬
전직 템플 기사단 출신인 이 카탈루냐인은 '카이사르'로 임명되었고, 그와 그의 기사들은 도시를 제외한 소아시아의 비잔틴 영지를 하사받았다. 영구 거처로는 갈리폴리가 주어졌지만, 그들은 현지 주민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주변 지역을 수시로 약탈하며 불바다를 남겼고, 동맹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았다. 이내 그들의 무법적 행동은 제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양측이 결별하게 된 정확한 이유는 100% 확실하지 않다. 안드로니코스가 더 이상 줄 돈이 없어서였을까? 그는 이미 1년째 급여를 연체 중이었다. 혹은 데 플로르가 자신만의 전제 정권을 세울까 두려워했을까? 어쨌든 결정은 내려져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공헌에도 불구하고, 오만한 라틴인은 길에서 비켜줘야 했다.
미카엘은 데 플로르를 아드리아노플로 초대했고, 2주 뒤인 1305년 4월 5일, 가장 유력한 기사들 몇몇과 함께 만찬에 청했다.
그런데 연회가 한창이던 중 홀의 문이 활짝 열리고 알란과 튀르크 용병들이 뛰어들었다. 알란의 지도자 이르콘(Yirkon)은 곧장 로저에게 달려가 등에 칼을 여러 번 찔렀다. 카탈루냐인은 아무것도 할 겨를이 없었다. 무장 해제된 채 술에 취한 부하들의 목이 하나둘 떨어지는 광경조차 보지 못한 채 그는 즉사했다.
미카엘은 학살이 시작되자마자 데 플로르의 아내를 데리고 휘장 뒤로 사라졌다.
학살은 아드리아노플의 거리로 이어졌고, 거의 1,300명의 알모가바르가 황제의 배신의 희생자가 되어 쓰러졌다.
'카탈루냐의 복수'
로저 데 플로르가 제거되자 비잔틴인들은 남은 군대를 손쉽게 격멸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일은 그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즉시 갈리폴리로 진격해 남은 기사들을 섬멸하려 했지만 오히려 패배했고, 베렝게르 데 엔텐차(Berenguer d'Entença)가 이끄는 카탈루냐인들은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며 역사에 '카탈루냐의 복수(Catalan Revenge)'로 기록될 대학살의 서막을 열었다.
그들은 트라키아로 넘어가 2년간 북부 그리스 전역에서 살육과 약탈의 폭주를 이어갔다. 이후 프랑크인이 점령한 남부 그리스로 진격해 1311년 알미로스 전투에서 프랑크 잔여 병력을 격파했고, 그 결과 아테네 공국과 오늘날 중앙 그리스 전역을 정복했다.
그리스에서의 카탈루냐 지배는 1311년부터 1388년까지 무려 77년간 지속되었다. 1388년, 네리오 아차이올리(Nerio Acciaioli)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이 수개월간의 포위 끝에 아크로폴리스를 함락시키면서 카탈루냐의 지배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