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러시아 역사가가 밝힌 카틴 학살의 진짜 원인, 7가지 이유

카틴 학살은 왜 일어났는가?

수십 년간 길러진 폴란드인에 대한 증오? 실패한 세뇌와 포로수용소 유지 비용의 과다? 히틀러에 대한 충성? 아니면 전쟁 패배에 대한 복수? 러시아 역사가 니콜라이 이바노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 교수에 따르면, 카틴 학살의 실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1940년 봄의 비극적 사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스탈린이 폴란드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포로로 잡힌 약 2만 2천 명의 폴란드 군인과 정복국의 정치 엘리트를 총살한 일은 소련 독재자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익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골칫거리도 되었다.

그렇다면 이바노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폴란드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과연 누구였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이유: 인간 생명에 대한 경멸

소련의 현실에서는 아무리 많은 수의 포로를 살해하더라도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제국 건설의 20년은 대량 탄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기념비적인 저작 『굴라크 군도』의 저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볼셰비키 혁명 초기부터 1956년까지 소련 강제수용소에서 6천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대부분은 스탈린 집권기의 희생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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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은 주로 공산 체제의 예속과 테러를 다루며 강제수용소에서의 고된 삶을 묘사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굴라크 군도』이다. 사진은 1974년경의 솔제니친이다.

이바노프 교수는 최근 출간된 저서 『폴란드식 공산주의(Komunizm po polsku)』에서, 폴란드인에 대한 탄압은 테러에 익숙해진 소련 시민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1934~1939년 이른바 '대숙청' 기간 러시아인과 다른 민족들이 흘린 피의 바다에 비하면 한 방울에 불과했다. 당시 약 20만 명의 폴란드계 소련 시민이 살해되었는데, 이는 1940년 봄의 희생자 수의 열 배가 넘는 숫자였다.

크렘린에게 폴란드 포로 몰살은 체제의 적과 싸우는 논리적 조치로 여겨졌다. 스탈린은 오랫동안 '공산주의 낙원' 건설에 필요 없는 실재하거나 허위의 반대파들을 숙청해 왔다. 폴란드인들은 차르 군대 장교, 귀족, 부르주아지, 지식인, 부농, 그리고 소수민족들과 같은 운명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유: 폴란드와 폴란드인에 대한 오랜 증오

전간기 내내 소련 선전은 폴란드인을 적이자 착취자, 민족 억압자로 그리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유포했다. 시민들은 폴란드가 첫 번째 분할 이전의 국경 회복을 꿈꾸고 있다고 들었다. 만평 속에서 우리나라는 피에 젖은 칼로 바다에서 바다까지의 국가를 만들려는 뚱뚱하고 콧수염 기른 '판(潘)'님으로 표현되었다. 주목할 점은 1930년대 소련 언론이 지목한 최악의 '파시스트 국가'가 나치 독일이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아니라 폴란드 제2공화국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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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폴란드식 공산주의』에서 이바노프 교수는 스탈린이 시민들을 겁주기 위한 적이 필요했으며, 폴란드가 '제국주의' 침략자 역할에 완벽히 들어맞았다고 지적한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폴란드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국가 중 가장 강력한 민주 의회제 국가였다. 1930년대의 대규모 탄압은 상상 속 폴란드 위협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1939년 8월 말부터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적극적인 동맹이 되었다. 폴란드군의 군사적 패전은 곧 소련 선전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폴란드 장교들은 겁쟁이이자 반동분자로 그려졌다. 9월 전역에서의 폴란드 패배와 국가 지도부의 해외 망명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세 번째 이유: 세뇌의 실패

독립 폴란드와 폴란드인에 대한 소련의 적대감은 우리나라에서도 반응을 불러일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에 갇힌 장교들의 압도적 다수는 소련 체제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폴란드 제2공화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저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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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장교 살해 결정은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내려졌다. 러시아 역사가 이바노프 교수에 따르면, 이 잔혹한 행동에는 훨씬 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이바노프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훌륭한 애국심이 크렘린의 폴란드인 몰살 결정에 크게 작용했다. 특히 폴란드 포로를 대상으로 한 선전 캠페인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이 컸다. 스탈린 국가의 행복한 삶을 찬양하는 소련 라디오 방송과 영화, 대담, 포스터 등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세뇌의 실패는 NKVD 정보원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그들은 포로들이 좌절하지 않았고,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소련 선전에 전혀 영향받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는 폴란드 생존자들의 증언과도 일치했다. 스타니스와프 스비아네비치(Stanisław Swianiewicz) 교수는 포로들 사이에서 애국적 정서가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기록했다.

네 번째 이유: 감당 못 하는 NKVD

폴란드인 살해에는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NKVD가 그토록 많은 수의 포로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바노프 교수는 『폴란드식 공산주의』에서 오스타시코프 수용소 사령관 파벨 보리소비치의 보고서를 인용한다. 그는 격리 시설에 침실 공간, 매트리스용 짚, 식수가 부족하다고 기록했다. 병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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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틴에서 살해된 장교들의 집단 매장지. 1943년 발굴 조사 당시 촬영된 사진이다.

더욱이 폴란드인들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1940년 1월, 대령들을 중심으로 한 한 무리가 스타로벨스크 수용소 사령관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명확히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체포된 것인지 억류된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 전쟁 전 최고군사법원 소속이던 에드워드 사스키(Edward Saski) 대령이 주도한 서한은 국제 적십자의 보호 접근 문제도 함께 제기했다.

게다가 1939년 말과 1940년 초에는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렘린에서는 곧 수천 명의 핀란드 포로를 수용할 자리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0년 2월 20일, NKVD 포로문제관리국은 '폴란드 문제'에 대한 '온건한' 해결책을 제안했다. 즉 수용소 수감자 대부분을 석방하여 고향으로 보내고, '명백한 반혁명 분자'에 해당하는 400~500명만 계속 구금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다르게 결정했다.

다섯 번째 이유: 히틀러에게 아부하기 위해

1941년 6월 이전까지 스탈린이 우리 민족에 대해 내린 '처방'은 히틀러의 정책과 일치했다. 두 독재자 모두 폴란드 엘리트의 물리적 말살과 나머지 사회의 노예화라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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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포로들이 나치 독일에 대해 품은 당연한 적대감도 소련 당국이 그들을 제거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폴란드인 살해는 아마도 독일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만 역사학자들은 카틴 학살이 히틀러의 요청으로 자행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일의 압력을 입증하는 단서들은 존재한다.

이바노프 교수는 게슈타포와 NKVD의 고위 인사들이 1939년 말과 1940년 초 자코파네, 크라쿠프, 리비우에서 열린 회담 등을 통해 폴란드인을 통제하는 방법을 논의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독일 장교들이 포로 살해를 참관했다는 신빙성 있는 듯한 보도들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독일은 확실히 1940년 봄 소련의 범죄를 알고 있었고, 3년 후에야 그것을 공개했다.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과 초기 독일군의 성공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폴란드 정책'을 완전히 재편하게 만들었다. 1941년 6월 22일 이후 기존의 우호국은 불구대천의 적이 되었고, 가장 어두운 색으로 그려졌던 폴란드인은 '슬라브 형제'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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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은 남아있는 문서와 증언을 바탕으로 여전히 카틴 학살의 명확한 원인을 규명하려 애쓰고 있다. 사진은 1943년 발굴 후 살해된 폴란드 장교들의 부검을 진행한 페렌츠 오르쇼스(Ferenc Orsós) 박사와 목격자 파르펜 키셸료프(Parfien Kisielew)가 대화하는 모습이다.

여섯 번째 이유: 베리야의 '업적'

카틴, 메드노예, 하르키우 및 기타 처형 장소에서 벌어진 비극의 직접적인 설계자는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였다. 스탈린의 요청에 따라 그는 폴란드 포로 문제에 관한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의안 초안을 준비했다. 이바노프 교수는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경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폴란드인의 물리적 제거를 제안했다고 분석한다.

코젤스크, 오스타시코프,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의 거의 2만 6천 명에 달하는 폴란드 포로와 구 폴란드 동부 변경 지역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의 몰살이 계획되었다. 이 범죄는 너무나 전례 없는 것이었기에 스탈린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총살된 사람들의 가족은 친척이 '서신 왕래 금지 조건으로 10년 징역형'을 받았다는 통보만 받았다.

그 거짓은 1943년 봄, 독일이 카틴 무덤을 공개하면서 비로소 드러났다. 서방 연합국의 태도는 폴란드인들에게 특히 아픔으로 남았다. 처칠과 루즈벨트는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소련 독재자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침묵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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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3월 5일 카틴 결정의 근거가 된 라브렌티 베리야의 청원서 첫 페이지.

일곱 번째 이유: 1920년에 대한 복수?

카틴 학살이 1920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볼셰비키가 겪은 패배, 혹은 러시아인들의 주장대로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러시아 포로들이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은 것에 대한 복수라는 주장이 때때로 제기된다. 『폴란드식 공산주의』의 저자를 포함한 비판자들이 이런 견해를 더 많이 갖고 있지만, 일정한 논리를 부인할 수는 없다. '비스툴라의 기적'은 실제로 유럽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했으므로, 복수심의 빌미가 될 만했다.

50년 후 러시아가 폴란드 포로 살해를 공식 인정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상쇄'할 만한 사건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던 시기,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여 소련의 억울함에 대한 '목록화'를 지시했다. 그때부터 러시아는 1920년 소련 포로에 대한 상상 속 폴란드의 죄상을 지칭하는 데 '반(反)카틴'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폴란드 지배 시도라는 유례없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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