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속임수는 필수다. 적을 기만하고, 흔적을 지우고, 유리한 척하며, 적을 다른 길로 유인하고 때로는 회전 자체를 피하는 것—이것이 노련한 지휘관들의 정석이다. 군사 역사가들이 전장에서의 블러핑 역할을 과소평가할 때도 있지만, 어느 웨일스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그들도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자랑스럽다는 알비온(영국)은 정복하기 어려운 땅으로 여겨져 왔지만, 불가능했다는 뜻은 아니다. 섬나라 사람들은 이미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정복왕 윌리엄'이 헤이스팅스에 상륙했을 때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연대기들은 1797년 프랑스의 영국 침공에는 별로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않았다. 제1차 대프랑스 동맹과 싸우던 파리 총재정부는 영국에 대한 교란 공격 계획을 세운 것이다.
철과 불, 애국심
혁명의 열기를 다른 나라로 확산시키겠다는 대원칙의 핵심은, 영국 본토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최초의 시도는 1년 전 라자르 오슈(Lazare Hoche) 장군 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는 가장 위험한 적에게 직접적이고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잉글랜드와의 연결이 끊기면 영국은 2류 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일랜드야말로 이상적인 무대로 여겨졌다.
이 작전을 위해 22,000명의 군대와 17척의 전열함으로 구성된 함대가 동원되었다. 해상 작전을 단순한 일로 여긴 오슈는 "기동도, 예술도 필요 없다. 철과 불, 애국심!"이라는 신념으로 작전의 완전한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나 극악의 날씨와 갈레스 제독의 우유부단함 탓에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라자르 오슈(Lazare Hoche) 장군
실패는 주모자들의 의욕을 꺾지 못했고, 귀국 즉시 다음 원정 준비가 착수되었다. 이번 상륙 목표는 웨일스였다. 두 번째 시도에서 총재정부는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작전에 배정된 부대는 겨우 1,400명뿐이었다. 짙게 염색한 영국군 포로 군복을 입었다 하여 '흑색 군단(Black Legion)'이라 불린 이 부대는 800명이 감옥에서 풀려난 일반 범죄자, 탈영병, 구 왕당파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에 보나파르트가 차출한 정규군 600명이 보충되었다.
보나파르트 자신은 북부 이탈리아의 격전에 몰두하며 성공의 가능성을 다른 곳, 즉 이집트에서 찾고 있는 듯했다. 흑색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배정된 함선은 현대식 프리깃함 2척을 포함해 4척이었다. 육상 작전의 지휘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군과 싸운 바 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윌리엄 테이트(William Tate) 대령에게 맡겨졌다.
프랑스 침공군은 1797년 2월 18일 카마레(Camaret) 항을 출항했다. 테이트의 계획은 브리스톨 인근에 상륙해 이 도시를 점령한 뒤 북쪽 체스터와 리버풀로 진군하는 것이었다. 빈민 소작인들과 도시 빈민층의 호응도 기대에 넣고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날씨가 계획 실행의 걸림돌이 되었다. 브리스톨 인근 상륙이 불가능해지자 테이트는 웨일스 남서부의 카디건 만(Cardigan Bay)으로 진로를 정했다. 2월 22일 프랑스군은 피시가드(Fishguard)에 접근했지만, 현지 요새의 영국군 포격을 받았다. 함대 사령관 카스타니에(Castagnier) 제독은 수비군의 포탄 재고가 고작 세 번의 일제사격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후퇴 명령을 내렸다.
상륙 작전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트의 부대는 피시가드에서 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카레그 와스타드 곶(Carreg Wastad Point) 근처에 닿았다. 2월 22일은 항해일지에 '2월 중 가장 온화한 날'로 기록될 만큼 평온했다. 겨울철 대서양 폭풍에 시달리는 이 지역에서는 더욱 드문 일이었다. 드디어 날씨가 침입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변한 듯 보였지만, 상륙 지점 자체는 행복한 선택이 아니었다. 카레그 와스타드 주변은 가파른 바위 절벽이 이어져, 수비군만 조금 더 잘 조직되어 있었다면 상륙 작전은 처참한 학살로 끝날 수도 있었다. 운 좋게도 란운다(Llanwnda) 마을 근처에 작은 모래사장이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흑색 군단의 상륙이 시작되었다.
2월 23일 새벽 2시까지 17척의 상륙정이 화약 통 47개와 탄환·수류탄 50톤을 실어 나르며 하역을 마쳤다. 또한 웨일스 반군이 사용할 머스킷 총 2,000자루가 영국의 모래사장 위에 내려졌다. 문제가 생기긴 했다. 과적된 상륙정 한 척이 침몰하면서 대포 몇 문을 바다 밑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대체로 영국 본토에 대한 마지막 상륙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이러한 보고를 받은 카스타니에 제독의 함대 대부분은 프랑스로 귀항했다. 그러나 승리를 너무 일찍 외친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의 성공을 훨씬 더 확실히 믿었다
상륙 이후 프랑스 침공군은 명백히 전투 의욕과 열정이 부족했다. 테이트 부대의 대다수는 침공보다 식량 확보에 더 관심이 있었다. 현지 주민들에게 반란 가담을 종용하는 시도도 있었지만, 좌초한 포르투갈 선박에서 와인 창고가 발견되고 나서는 국가적 대사 따위는 확실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가장 평범한 약탈이 시작된 것이다. 인근 교회조차 약탈당했고, 한 프랑스 장교는 나중에 훔친 은판기를 팔다가 붙잡히기까지 했다.
결국은 블러프
2월 23일 아침, 초기의 혼란이 가라앉은 뒤 현지 주민들은 동원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장이 열악했지만 싸울 의지는 넘쳤다. 한 교회의 지붕에서 납을 뜯어내 탄환을 주조하는가 하면, 프랑스군을 실제로 위협할 수 있는 정규군을 기다렸다.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코더 경(Sir John Cawdor)이 곧 도착해 지방 민병대 250명, 예비군 300명, 수병 150명과 대포 몇 문을 규합했다. 교전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술에 취해 무질서하게 총을 쏘는 적과의 스커미시도 있었다. 이 전투의 흔적이자 지금도 지역 명물이 된 것은 브레스트간(Brestgarn)의 한 집에 있는 오래된 시계에 박힌 총알 구멍이다. 코더의 병사들과 주민들은 약탈자 무리를 손쉽게 잡아냈지만, 어느 누구도 지역 구두장이의 아내 제마이마 니컬러스(Jemima Nicholas)의 활약을 능가하지 못했다. 건초쇠 하나를 들고 충실한 개 한 마리의 조력까지 얻은 그녀는 프랑스군 포로 십여 명을 혼자 붙잡아 지역 교회로 호송했다.
저녁 무렵 영국군은 피시가드에 접근했지만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좁은 거리를 따라 기동하다가는 아직도 위력적인 테이트 정규군 병사들의 사격으로 참혹한 손실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침이 가져올 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테이트는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특히 영국군의 실제 병력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교들을 코더의 사령부로 보내 조건부 항복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코더는 자신이 수적 우세를 크게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무조건 항복만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최후통첩의 기한은 2월 24일 오전 10시였고, 거부 시 즉각적인 공격이 예고되었다.

피시가드의 로열 오크(Royal Oak) 선술집
다음 날 아침 8시경에도 프랑스군은 아직 항복을 결심하지 못한 채 전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영국인들의 거대한 행렬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정규군만이 아니었다. 코더의 권유로 전통 의상—높은 검은 모자와 빨간 스카프—을 갖춰 입은 웨일스 여성들과 아이들이 수비군의 빈약한 대열에 섞여 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복장은 멀리서 보면 영국군의 빨간 상의와 비슷해 보였고, 수비군의 숫자는 몇 배로 불어난 것처럼 보였다. 코더의 설득이 아니라 단순한 여성들의 호기심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전장으로 몰려왔다는 학설도 있다. 기만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결과는 같았다. 테이트는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프랑스 군선 2척도 함께 포획되었다. 포로 대부분은 몇 년 안에 귀국했으며, 그중에는 테이트도 있었다. 적어도 나폴레옹이 끝내 이루지 못한 일—영국 본토 침공—은 그가 해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