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치마를 입은 마틴 루터 — 종교개혁을 이끈 여성,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

남편에게는 아내를 벽속에 가두거나, 최소한 손가락을 잘라 글을 쓰지 못하게 하라는 압박이 가해졌습니다. 루터는 처음에는 그녀의 활동을 격려했지만, 곧 위험한 경쟁자가 자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과연 누구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독일 종교개혁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여성은 바로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Argula von Grumbach)였습니다. 바이에른 출신 귀족 여성으로서 성경에 조예가 깊었고, 종교개혁의 아버지 루터는 물론 안드레아스 오시안더, 게오르크 스팔라티누스 등과 서신을 주고받는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녀는 종교개혁의 아버지를 둘러싼 각종 논란을 잘 알고 있었으며, 때로는 작센 공작 프리드리히나 라인 팔츠의 요한 같은 군주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직접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의 종교개혁

그녀는 라틴어를 알지 못했지만 독자적인 신학을 발전시켰고, 이는 처음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신학의 기본 방향은 사실 매우 단순했습니다. 폴란드의 역사가 마리아 보구츠카는 논문 「종교개혁·반종교개혁과 근대 초입의 여성의 지위」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그녀의 신학은 성경에 기반을 두었다. 성직자들에 대한 혐오감이 특징이었지만, 성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인전 읽기를 소중히 여겼다. 즉, 그녀는 종교개혁의 모든 주장을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생각은 루터만큼 급진적이지 않았고, 일반 민중의 삶에 가까운 종교성의 측면을 유지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저술들은 여러 차례 재판될 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르굴라의 활동은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서 특히 각성하던 시기였던 16세기 전반기에도 놀라운 수준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초기를 연구한 학자 폴 러셀은 자신이 분석한 1523~1524년 사이에 만들어진 종교 팜플렛 중 거의 3분의 1이 여성이 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 본인도 최소 여덟 편의 서로 다른 텍스트를 출간했으며, 이만큼의 글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자는 부엌에 있는 게 마땅하다"

그렇다면 학자들과 성직자, 그리고 종교적 변화를 추진하던 이들은 이 여성 개혁자에게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적극적인 역할을 옹호하자, 인골슈타트 대학교의 학자들은 그녀에게 부엌과 물레질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롱조차 용감한 귀족 여성을 꺾지 못했습니다.

치마를 입은 마틴 루터 — 종교개혁을 이끈 여성,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는 뛰어난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개신교 독일에서 자신의 저술이 인쇄물로 출간된 최초의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고, 여러 목소리가 오갔습니다. 보구츠카는 이렇게 전합니다.

논쟁은 (...) 독일의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고, 어떤 이들을 겁먹게 하기도 했다. 심판의 날 이전에 여성이 예언자로 불릴 것이라고 예언했던 예레미야의 말씀이 회자되었다. 아르굴라의 남편에게는 아내를 입막음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예컨대 손가락을 잘라 글쓰기를 어렵게 하거나, 벽속에 가두어 세상과 격리시키라는 제안까지 나왔다.

누가 더 강한 의지의 소유자인지는 금방 드러났습니다. 아르굴라는 남편에게 굴복하지 않았고, 이윽고 두 사람은 별거에 이르렀습니다. 불행한 첫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재혼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 선택한 배우자 역시 함께한 시간이 짧았습니다.

그러나 아르굴라에게 이것은 오히려 가장 유익한 결과였습니다. 과부가 된 그녀는 자유롭게 자신의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선전 활동과 정치에 뛰어들었고, 장례식이 열리는 묘지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성별과 계급의 평등을 강조했습니다. "여자든 농부든, 모두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치마를 입은 마틴 루터 — 종교개혁을 이끈 여성,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

경쟁자를 두려워한 루터

처음에 아르굴라의 열정은 루터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1523년 루터는 그녀를 칭찬하며 계속 글을 쓰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곧 종교개혁의 아버지는 위험한 경쟁자가 자라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성이 더 약한 존재라는 점을 예전보다 더 강조하기 시작했고, '동료'를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는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설교하려 든다면 어떨까? 얼마나 소란이 벌어지겠는가!"

아르굴라의 신학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빠르게 잊혔지만, 루터는 사후에야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개신교 공동체가 여성을 목사로 안수할 뿐 아니라 감독으로 임명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이나 독일의 루터교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이 '소란'에 대해 언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다음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마리아 보구츠카(Maria Bogucka), 「종교개혁·반종교개혁과 근대 초입의 여성의 지위」, Semper, 바르샤바 2008, 430~4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