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고대 페르시아의 독가스와 스파르타의 화염방사기 – 화학무기는 언제 처음 사용되었을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말은 피로 물든 무력 충돌의 현장에서도 똑같이 들어맞는다. 살상 도구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비록 화학무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지만, 생물 테러의 흔적은 아득한 과거에서도 이미 발견된다.

동물의 독, 전술가 아이네이아스의 전쟁 교범

전쟁 건축학은 극도로 복잡한 학문이다. 적절한 방어 시설의 준비, 자연 환경과 지형 조건의 활용, 그리고 예측하기 어려운 변덕스러운 날씨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작가이자 지휘관인 '전술가 아이네이아스(Aeneas Tacticus)'는 여러 권의 전쟁술 교범을 저술했던 인물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대 페르시아의 독가스와 스파르타의 화염방사기 – 화학무기는 언제 처음 사용되었을까?

1916년 프롬엘 전투 중 가스 공격의 참상.

고대의 학자이자 아마도 최초의 군사 이론가였던 그는 적어도 벌, 말벌, 전갈 같은 동물을 전투에 활용할 것을 권유했다. 곤충들을 항아리에 밀봉한 뒤 적진으로 던지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독의 원천은 이보다 훨씬 다양했다.

지하 도시의 독가스 통로 – 페르시아인들의 무기

화학무기는 언제 처음 사용되었을까? 놀랍게도 고대인들은 오늘날 생물학, 화학, 물리학으로 분류되는 지식을 이미 자신들의 무기고를 강화하는 데 활용할 줄 알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산조 페르시아이다. 로마 제국과 벌인 한 전투에서 그들은 정말로 악마적인 발상을 내놓았다.

고대 페르시아의 독가스와 스파르타의 화염방사기 – 화학무기는 언제 처음 사용되었을까?

256년 유프라테스 강변 두라 유로포스 공성전의 흔적. 공격측 페르시아군은 성벽 아래로 지하 통로를 파고 그곳으로 역청과 유황 결정 혼합물을 흘려보냈다.

전장은 현재 시리아에 위치한 두라 유로포스(Dura Europos)라는 도시였다. 바로 이곳에서, 아마도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새로운 공성 전략이 의도적으로 동원되었다. 페르시아 군대가 로마군을 독가스로 공격한 것이다. 물론 이 공세에는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페르시아군은 우선 높은 제방을 쌓아 방어벽을 습격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어서 도시 아래로 이어지는 터널을 파기로 결정했고, 로마 지휘관들은 이에 맞서 자신들만의 터널망을 구축하는 역공에 나섰다. 그리고 바로 그 지하에서 사산조 군대는 치명적인 독을 풀어버렸다.

터널 안에서 역청(석유 정제 과정에서 얻어지는 성분)과 유황 결정이 함께 타올랐다. 이 극도로 치명적인 혼합물의 증기는 굴착 구간을 따라 로마군 진영으로 스며들어 최전선 부대를 몰살시키는 독가스가 되었다. 라이스터 대학교의 사이먼 제임스(Simon James) 교수를 비롯한 현대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이 만든 터널의 구조 자체가 독가스가 지하로 퍼져 나가기 좋은 형태였다고 한다. 즉 이 전략은 우연이 아니라 치밀하게 설계된 계획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쥐처럼 도망쳤다 – 스파르타의 불 함정

기원전 429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플라타이아를 포위한 스파르타군은 성벽 밖에서 나무, 타르, 유황을 섞어 만든 혼합물에 불을 붙이기로 했다. 독성 연기는 순식간에 주민들을 방어선에서 밀어냈고, 그들은 가라앉는 배—이 경우에는 불타는 배—에서 쥐처럼 도망쳤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저자 투키디데스가 이를 기록하고 있다.

"라케다이몬인들(주: 이는 스파르타 주변에 거주하던 민족들을 통칭하는 이름이다)은 작은 도시라면 불태워 없앨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들은 정규 포위전에 드는 비용과 노력 없이 플라타이아를 어떻게든 정복하고 싶어 했는데, 그 결과 인간의 손으로 일으켜 본 적 없던 대화재가 일어났다."

고대 페르시아의 독가스와 스파르타의 화염방사기 – 화학무기는 언제 처음 사용되었을까?

더욱 흥미로운 점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군사 역사상 최초로 화염방사기의 원형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빌려 이 기계를 묘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긴 들보를 가져와 세로로 쪼갠 뒤 양쪽 모두를 속이 파이게 하고 다시 합쳐 하나의 관(管)을 만들었다. 들보의 한쪽 끝에는 사슬에 매단 솥을 걸었고, 들보에서 철 깔때기를 솥으로 연결했다. 게다가 들보의 대부분은 철판으로 덮여 있었다…"

이후의 기록에 따르면, 이 기계를 통해 통과된 공기의 흐름이 불을 붙여 고대의 요새 방어 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화염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적인 설계의 휴대용 화염방사기는 1910년 독일 발명가 리하르트 피들러(Richard Fiedler)가 특허를 받았다. 이 살상 도구의 위력은 1915년 2월, 독일군이 말랑쿠르(Malancourt)에서 프랑스군에게 이 치명적인 무기를 사용하면서 전장에서 입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화학무기가 더 큰 규모로 사용되었으며, 그 증거는 연대기에서도 명백히 찾아볼 수 있다.

눈물과 땀, 피로 물든 들판 – 제1차 세계대전 전장의 산 증거들

독일군이 새로운 유형의 무기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14년 10월 17일 서부 전선에서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날짜는 대중의 기억에 남지 못했다. 그 이유는 뇌브샤펠(Neuve-Chapelle) 지역에서 독일군이 연합군 진지에 최루탄을 발사했을 때 사용된 무기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겁을 주는 허수아비, 유령 같은 위협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17년, 파괴력의 본질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된 독일군은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무기를 동원했다. 유명한 이프르(Ypres) 공격에서 사용된 머스터드 가스, 즉 황가스였다. 벨기에의 이 도시에서는 네 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중 가장 끔찍했던 것은 독일군이 독가스 작용제로 염소를 사용한 두 번째 전투였다.

협상국 측에서만 7만 명의 희생자(사망 또는 실종)가 보고되었으며, 이 전투는 전쟁의 양상 자체를 바꿔 놓았다. 전투 이후 양측 모두 부대에 특수 보호 장비를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후의 화학 공격은 그만큼 치명적이지 못했다.

고대 페르시아의 독가스와 스파르타의 화염방사기 – 화학무기는 언제 처음 사용되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 중 염소 가스 화학 공격.

황가스는 발포성 작용제 계열에 속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이 물질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만, 화학 작용으로 인한 손상이 너무 커서 부상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실제로는 마비시켜 버린다. 심각한 피부 화상과 호흡기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실제 고문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죽음을 몰고 온다. 생존자들은 전우들이 아직 살아 있었지만 사실상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회상했다. 부상자들의 몸은 빠르게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고, 입에서는 섬뜩한 거품이 흘러나왔다. 독은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말은 피로 물든 무력 충돌의 현장에서도 똑같이 들어맞는다. 살상 도구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고, 비록 화학무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지만, 생물 테러의 흔적은 아득한 과거에서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스파르타의 불 함정, 페르시아인들이 설계한 지하 도시의 독가스 통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군이 사용한 치명적인 염소 가스는 화학무기가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 중 하나임을 웅변적으로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