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상당 부분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2월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은 이처럼 잔혹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전쟁 범죄였는지, 집단 학살 행위였는지, 아니면 불가피한 '필요악'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5년 넘게 이어진 전쟁의 결말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제3제국은 곧 소멸할 운명이었다. 1945년 2월, 히틀러와 소수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독일이 여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서쪽으로는 연합군, 동쪽으로는 붉은 군대의 포위망에 갇힌 독일에게는 다시 일어설 기회조차 없었다.
바로 그 시점에 연합군 공군 사령부는 드레스덴을 지워버리겠다는 전례 없는 폭격 작전을 결정했다. 이 도시에는 방공 시설이 없었고, 군사적으로나 전략적으로도 특별한 가치가 없었다. 피오트르 지호비치는 저서 『연합군』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패배한 상대를 고문하는 사디즘적 행위였다. 오늘날까지 드레스덴의 파괴는 어두운 인간 본성과 전쟁의 악몽을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죽음의 명단
도시에 대한 사형 선고는 이미 1944년 11월에 내려져 있었다.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영국 공군 원수 아서 해리스의 악명 높은 '죽음의 명단'에 드레스덴이 올랐던 것이다. 그는 제3제국의 최대 도시 60개를 지면에서 지워버릴 계획이었다. 그가 주도한 융단폭격이 시작되자 독일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연합군은 드레스덴을 폐허와 잔해의 바다로 만들었다.
역사학자 보그단 무샤우 교수는 "독일 민간인들은 적의 공격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었다. 독일은 다른 나라들이 자신을 점령했듯 점령당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몰랐다"고 설명했다.
드레스덴의 섬멸은 1945년 발렌타인 데이 전야에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 폭격의 목적은 드레스덴 철도 교차점 파괴였다. 그러나 선로는 겨우 손상을 입었을 뿐 금세 복구되었다. 반면 구시가지는 거의 완전히 폐허로 남겨졌다.
낮처럼 밝았던 밤
1945년 2월 13~14일 밤, 약 800대의 영국 에브로 랭커스터 폭격기가 드레스덴 중심가 상공으로 날아들었다. 폭격은 두 차례의 파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당시의 비극을 직접 목격한 독일 유대인 빅토르 클렘페러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곧 다가오는 비행기들의 더 깊고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다. 조명이 꺼졌고, 근처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숨을 고르는 짧은 침묵. 사람들은 의자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 신음하고, 누군가 울고 있다. 다시 날아온다, 죽음이 또다시 목구멍을 노린다, 또 하나의 폭발.
이 글은 피오트르 지호비치의 신작 『연합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이야기 V』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모른다. 갑자기 지하실 창문이 열렸다 — 밖은 낮처럼 밝았다. 누군가 외쳤다. "소이탄이다, 꺼야 한다!" 두 사람이 소화 펌프에 매달렸고, 물을 뿌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 많은 폭발이 이어졌지만, 마당이 아니라 어딘가 더 먼 곳에서였다(…). 밖은 정말 낮처럼 밝았다.
연합군은 주로 소이탄을 사용해 공격했기 때문에, 도시의 거리는 대규모 화재에 휩싸였고 결국 화재폭풍(firestorm)으로 치닫게 되었다.
지상의 지옥
그 후 벌어진 일은 소규모 종말이라 불릴 만했다. 브와디미에시 칼리츠키가 기술했다.
진정한 지상의 지옥이 시작된다 — 화재폭풍이다. 동시에 타오르는 집들의 무리가 수백 미터 높이로 불꽃, 연기, 뜨거운 공기의 기둥을 내뿜는다. 그 아래에서는 놀라운 힘으로 주변의 차가운 공기를 빨아들인다. 회오리바람처럼 화염 주위를 고속으로 회전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사람들이 허공으로 날려 올라가 거대한 불기둥 속으로 사라진다.
연합군의 공습 이후의 드레스덴
화염의 벽이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산소가 급속히 고갈되었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드레스덴 공습 희생자의 거의 4분의 3이 질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두 번째 파도로 출격한 영국 조종사들은 더욱 어려운 임무를 안고 있었다. 도시가 거대한 연기 장막에 덮여 있어 사실상 눈을 감고 폭탄을 투하해야 했기 때문이다. 브와디미에시 칼리츠키는 이렇게 덧붙였다. "국지적인 화재폭풍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거대한 화재폭풍이 형성되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도시는 높이 4km의 횃불로 변한다. 그런데도 폭격의 공식 명분이었던 철도 교차점만은 사실상 멀쩡히 남았다."
범죄의 대가
파괴 작업은 2월 14일, 311대의 미국 보잉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에 의해 이어졌다. 구시가지는 유린당했다. 불길은 수백 점의 값진 문화유산, 박물관과 도서관의 소장품, 기록보관소와 예술작품을 삼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민들의 주택까지. 드레스덴은 꺼져가는 불씨의 연기로 뒤덮인 황무지로 변했다. 피오트르 지호비치는 『연합군』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도시 상공을 연이어 통과한 폭격기 편대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 함께 건물을 강력한 착암기처럼 부수었다. 4,000톤의 폭발탄과 소이탄이 끔찍한 굉음과 함께 도시에 쏟아져 드레스덴의 6.5㎢를 지면에서 지워버렸다. 소이탄만 65만 발이었다! 비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루프트바페가 런던에서 파괴한 면적은 2.4㎢에 불과했다.
드레스덴 공습으로 인한 희생자는 1만 8천 명에서 2만 5천 명에 이른다.
수년간 역사학자들은 공습의 사망자 수를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가장 파격적인 추산은 무려 50만 명에 달했고, 나치 선전은 약 20만 명을 내세웠다. 이후 더 절제된 수치들이 제시되었다 — 3만 5천 명(1965년),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작센 당국이 구성한 조사위원회의 결론은 1만 8천~2만 5천 명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연구자들은 제3제국 항복을 눈앞에 두고 연합군이 이러한 공격을 감행한 결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는 드레스덴을 비롯한 독일 도시들에 대한 융단폭격을 전쟁 범죄로 규정한다. 또 다른 이들은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 불가피했던 악이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이 폭격을 정당한 보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RAF 원수 아서 '도살자' 해리스가 이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요청받았을 때 남겼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저들이 바람을 뿌렸으니, 이제 폭풍을 거두어 가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