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로마 제국의 수도는 로마만이 아니었다? 잊혀진 제국의 여러 수도들

로마 제국의 수도라고 하면 누구나 로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고대 도시 중 이 영예로운 지위를 차지했던 곳은 과연 얼마나 많았을까?

"오늘날까지 어떤 나라도 이처럼 광대하고 오래 지속된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그리스 국가들의 화려함은 보잘것없어 보인다…" — 알렉산드리아의 아피아노스는 2세기 중반 이렇게 기록했다. 헬레니즘 이집트 출신의 이 그리스인이 조상들의 업적을 그토록 깎아내렸다면, 로마 제국의 위력에 실제로 깊은 감명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고대 세계의 규모는 현대인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즉 로마 제국이 영토 확장의 정점에 달했을 때 제국 국경의 총 길이는 거의 1만 킬로미터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제국은 페르시아만 연안에서 북아프리카 모로코까지, 이집트 해안에서 스코틀랜드 중부까지 그 영역을 뻗고 있었다. 이후 세월에 걸쳐 영토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이를 통치하는 일 자체가 여전히 상당한 도전 과제였다.

로마 도로, 제국의 생명선

이토록 광대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도로망이 제공한 효율적인 소통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로마 도로는 의심할 여지 없이 로마인들이 이룬 가장 위대한 공학적 성취 중 하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천재성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 분야의 저명한 연구자 알베르토 안젤라는 "도로가 없었다면 로마인들이 이룬 세계 최초의 글로벌화는 실패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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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도로망은 군단의 신속한 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무역을 활성화했으며, 정보의 빠른 전달을 실현했다. 나아가 사상, 예술 경향, 철학과 종교관의 확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도로는 이 모든 생명선이 향하는 도시로서 로마의 권위를 드높이는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로마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흐려져 가는 수도로서의 역할

왕정, 공화정, 그리고 제정 초기에는 로마가 논쟁의 여지 없는 국가의 수도이자 고대 세계의 중심이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모든 결정이 이곳에서 내려졌고, 왕과 원로원 의원, 그리고 초대 황제들이 로마에서 정복할 땅과 민족을 결정했다.

그러나 235년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제위 계승에 대한 명확한 규칙이 부재했기에 대부분의 후계자들이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에 올랐다. 그들의 통치는 보통 몇 달을 넘기지 못했고,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손에 끝나곤 했다. 235~284년 사이에 20명이 넘는 찬탈자와 왕위 주장자가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며, 공식적으로 제위에 오른 자만 26명에 달했다.

로마 제국의 수도는 로마만이 아니었다? 잊혀진 제국의 여러 수도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수도는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잃어갔다. 이른바 '군인 황제'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부임지인 속주에서 보냈다. 동쪽에서는 페르시아 사산조가, 북쪽에서는 게르만 부족이 압박하면서 제국 국경의 위기가 심각해졌고, 이는 그들을 위험 구역에 머물게 만들었다. 여기에 도시 귀족층의 정치적 개입과 여전히 막강한 원로원의 감시까지 더해지자, 이런 통치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군인 황제들은 티베르 강변의 도시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결국 국가 수도로서 로마의 역할은 다른 도시들, 더 정확히는 황제의 존재만으로 수도를 자처하게 된 군영(軍營)들 속에 묻혀 버렸다.

로마가 아니라면 어디인가?

이러한 임시방편적인 국가 운영은 293년까지 이어졌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역시 군단병들의 추대로 즉위한 인물)가 제국 통치 체계에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속주 행정 개편의 결과로 이탈리아뿐 아니라 '영원한 도시' 로마마저 특권적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진짜 결정타는 소위 사두정치(테트라르키아), 즉 두 명의 상위 황제(아우구스투스)와 두 명의 하급 통치자(카이사르)가 권력을 분담하는 체제의 도입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경의 위기를 고려할 때, 그토록 광대한 제국을 한 사람이 다스리는 기존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권력 분할이라는 발상 자체는 꽤 성공적이었다. 공동 통치 4인조가 국가의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 문제는 오히려 크게 복잡해졌다. 각 통치자가 서로 다른 영토를 담당했기에, 단일 수도 중심의 통치는 기껏해야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수도는 선택의 문제가 되다

역사학자들의 지적대로,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로마에 동격의 제2수도를 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동부를 담당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서부를 맡은 막시미아누스의 길은 로마로 향하지 않았다. 그 자리는 콘스탄티노플이 대신 차지했다. 군영 castrum romanum을 본떠 건설된 대도시였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현재의 스플리트에도 웅장한 궁전을 지었다. 사두정치의 설계자는 안티오키아, 세르디카(현 소피아), 테살로니키, 그리고 시르미움(스렘스카미트로비차) 같은 도시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특히 시르미움은 국가의 주요 수도 중 하나로 격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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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막시미아누스는 처음에는 트리어를, 이를 카이사르 콘스탄티우스 1세에게 넘긴 뒤에는 밀라노를 최적의 거점으로 삼았다. "라인강과 다뉴브강의 전략적 국경에 충분히 가까우면서도 로마의 영향력에서 적절히 벗어난 도시"라고 연구자 매슈 번슨은 설명한다. 이때부터 5세기 초까지 역대 서방 황제들이 이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것이 과연 로마 제국인가?

후기 사두정치가들의 권력 다툼 끝에 영원한 도시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306~312년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옛 영광을 되살리려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오히려 로마의 몰렁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체제의 붕괴 역시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최종 승자 콘스탄티누스 1세는 티베르 강이 아닌 보스포루스 해협을 중심으로 제국을 통치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후계자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완전히 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379년 테오도시우스 1세 치세까지 콘스탄티노플은 안티오키아와 함께 제국 동부의 수도 지위를 나눠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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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 라벤나로!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 서방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 호노리우스 역시 로마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밀라노에 정착했지만, 서고트족의 위협이 날로 커지자 402년 이탈리아 북동부 해안의 라벤나로 수도를 천도했다.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로마 함대의 항구였던 이 도시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난공불락의 요새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지켜본 곳은 영원한 도시가 아니라 라벤나였다. 그리고 티베르 강변의 도시를 유린한 서고트족과 반달족만이 옛 로마 제국 수도의 영광을 기억하는 듯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