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식인 통계, 굶주린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잡아먹혔는가

1941년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강공에 실패하자,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도시를 굶겨서라도 항복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독일군은 포위된 시민들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그 생존에는 어떤 처참한 대가가 따랐을까요?

식인(anthropophagy)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금기 중 하나입니다. 문화적 배경 외에도 생물학적으로도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인간의 고기를 먹는 행위는 프리온처럼 바이러스와 유사하게 작용하는 비정상 단백질 때문에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에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동족을 먹어야 했던 사례가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련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당국의 정책이 반복적으로 극심한 기근을 초래했고, 그 기근이 사람들에게 인류 최대의 금기를 깨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941년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자 도시의 물자 공급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9월 8일부터 10일까지 루프트바페(독일 공군)는 바다예프 창고를 파괴했습니다. 알렉시스 페리(Alexis Peri)가 저서 『레닌그라드, 포위된 도시의 일기』에서 강조하듯, 시 당국은 미약한 식량 비축물을 무분별하게 이 한 곳에 모아두었고, 계산상 도시 내 식량은 겨우 17일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배급량은 놀라운 속도로 무려 80%나 삭감되었고, 동시에 당국의 지시에 따라 빵의 무게마저 속였습니다. 1941~1942년 겨울은 포위 전체 기간 중 가장 혹독한 시기로 기록됩니다.

도시 전체를 굶기다

상황은 주가 지날수록 더욱 절박해졌고, 페리가 지적하듯 11월에는 식량 배급이 최저점에 도달했습니다. 하루 125그램의 빵. 이 미량의 배급을 도시 인구의 무려 3분의 2가 받았습니다. 같은 달, NKVD(소련 내무인민위원회)는 최초의 레닌그라드 식인범을 체포했습니다.

식인 문제는 빠르게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아카이브 문서를 바탕으로 포위전의 역사를 연구한 리처드 비들랙(Richard Bidlack)과 니키타 로마긴(Nikita Lomagin)에 따르면, 살인과 식인은 곧 중대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식인 통계, 굶주린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잡아먹혔는가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빵은 금보다 귀했습니다. 빵을 구하지 못한다면 선택할 대안은 많지 않았습니다…(사진: 세르게이 스트룬니코프, 퍼블릭 도메인)

2004년에 기밀이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약 2천 명이 식인죄로 체포되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인육을 먹는 행위는 형법상 강도 행위와 유사한 '사회적으로 위험한 범죄'로 분류되었다고 합니다.

NKVD의 1941년 12월 12일자 보고서에는 9건의 식인 사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달 수백 명의 식인범

식량 관련 범죄는 날이 갈수록 만연해졌습니다. 사람들은 훔치고, 살인하고, 빵 가게를 약탈했으며, 마침내 서로를 잡아먹기까지 했습니다. 스탈린과 소련 내무인민위원 라브렌티 베리야는 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반정부 비판 발언으로 체포된 사람들, 급증하는 사망률, 배급표 절도, 식인에 관한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받아 읽었습니다.

식인을 막기 위해 NKVD는 경찰과 정신과 의사로 구성된 특별반을 조직했습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갈수록 커져만 갔습니다. 포위전 첫 겨울의 통계는 섬뜩하기 짝이 없습니다. 비들랙과 로마긴이 인용한 NKVD의 식인범 체포 통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12월 – 43명
1942년 1월 – 366명
1942년 2월 – 612명
1942년 3월 – 399명
1942년 4월 – 300명
1942년 5월 – 326명

강조할 점은 이것이 적발된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포위전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식인 사례는 훨씬 더 많았습니다. 페리의 기록에 따르면 식인죄로 체포된 사람 중 3분의 2는 여성이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게다가 낯선 사람보다 친족이 잡아먹히는 경우가 더 잦았습니다.

포위 기간의 기록 중에는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먹거나, 자녀에게(심지어 형제자매의 살점까지) 사람 고기를 먹인 사례를 언급한 것이 적지 않습니다. 페리가 소개한 한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구조하는 일을 맡았던 알렉산드르 미로노프는 어느 카가노프라는 여성의 아이들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굶주림에서 구원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로 인육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미로노프는 이 '끔찍하고 더러운'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두려웠고, '관리인조차 [자신과 함께] 그 아파트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데려가는 일 또한 쉽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날고기를 남겨두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입니다.

비들랙과 로마긴에 따르면 NKVD 보고서의 통계 자료를 통해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전형적인 식인범의 사회적 초상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이들 중 3분의 2는 여성이었고, 85%는 다른 지역에서 온 피난민이었습니다. 이들은 후방 지원 시설 없이 굶주린 도시에 갇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식인 혐의로 고발된 사람들 상당수는 생계 수단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평범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레닌그라드에서 안식처를 찾았지만 포위막이 완성되기 전에 철수하지 못했습니다. 상당수는 배급표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식량이 필요했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녀를 먹여 살리고자 했습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식인 통계, 굶주린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잡아먹혔는가

굶주린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무기력에 빠지거나 기아성 영양실조에 걸렸고, 탈진으로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그중에는 극도로 절망한 나머지 시신을 먹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사진: 퍼블릭 도메인)

식인범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는가?

1942년 1월 20일부터 23일까지 식인 문제를 논의하는 최고 권위의 의료 전문가들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그룹에는 저명한 정신과 의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식인범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군사법정을 지원할 예정이었습니다. 당국은 식인범을 제정신으로 간주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의료 전문가들은 모든 사례를 개별적으로 판단할 것을 권고하면서도, 이들이 모두 사회에 위험하므로 격리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식인에 손을 댄 사람들 상당수는 제정신이었지만, 동시에 악의 깊은 범죄자로 단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회의 시점까지 식인 혐의 사건의 59%가 사형으로 끝났고, 많은 이들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으며, 일부의 최후는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전문가들의 권고 이후 군사법정과 검찰은 유죄자를 좀 더 온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식인으로 이성을 잃은 경우, 전과가 없는 경우, 또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식인을 택한 경우는 사형 선고 빈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참고 자료

  1. Barber J., Dzeniskevich A., 『Life and Death in Besieged Leningrad 1941–1944』, Palgrave Macmillan, 2005.
  2. Bidlack R., Lomagin N., 『The Leningrad Blockade, 1941–1944. A New Documentary History From The Soviet Archives』, Yale University Press, 2012.
  3. Glanz D.M., 『The Siege of Leningrad 1941–1944. 900 Days of Terror』, Spellmount, 2001.
  4. Peri A., 『Leningrad. Journals from a Besieged City』, Horizon, 2019.
  5. Reid A., 『Leningrad. The Tragedy of a Besieged City』, Wydawnictwo Literackie,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