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그림자처럼
그는 그림자처럼 히틀러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행 중에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고, 언제든 수술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퓌러(총통)의 주치의 칼 브란트(Karl Brandt)는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잔혹한 인체 실험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나치의 전국 단위 안락사 프로그램, 이른바 'T4 작전'의 주도자였습니다.
충실한 동반자
1934년, 칼 브란트는 히틀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히틀러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수행 의사(Begleitarzt) 역할을 맡겼습니다. 브란트는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그의 전기를 쓴 울프 슈미트(Ulf Schmidt) 교수는 브란트가 위대한 일을 하도록 영감을 주며 기댈 수 있는 특별한 인물을 찾고 있었고, 그 대상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고 강조합니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충실한 개처럼 독재자 곁을 따라다녔습니다. 함께 독일의 도시와 마을을 방문했고, 당의 핵심 인사들과도 가까워졌습니다. 저서 『히틀러의 의사들의 전쟁』에서 바르토시 T. 비엘린스키는 이렇게 적습니다.
외과의로서 브란트는 사실 불필요한 존재였습니다.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히틀러를 암살하려 하기 전까지, 히틀러는 베를린 밖에 있는 동안 즉각적인 의료 처치가 필요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요컨대 구급 가방과 응급 처치 키트를 들고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하며 곁에 대기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히틀러의 부관들도 고용주의 건강과 무관한 의료 문제까지 브란트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의 경력은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의사 국가시험을 치른 지 10년 만에, 퓌러의 임명으로 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히틀러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는 또 다른 개인 의사인 테오 모렐(Theo Morell)과 '환자 A'의 총애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비엘린스키는 "두 의사가 갈등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평합니다.
"죽음의 은총"
1939년, 칼 브란트는 마침내 어두운 면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비엘린스키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10월 초, 폴란드에서 저항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고 정복된 땅에 점령의 지옥이 시작되던 무렵, 브란트는 베르크호프로 소환되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정신병원 환자들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말했습니다. "저 불쌍한 존재들은 홀로 두어야 한다." 즉 안식, 혹은 '죽음의 은총'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계획된 작전이 아동에만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브란트는 '무가치한 생명'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제3제국을 청소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이 작전은 역사에 'T4 작전'으로 기록되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거론된 수치에 따르면 최대 25만 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죽음의 은총'이라는 개념은 브란트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 그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나 눈이 멀고 간질을 앓던 신생아, 이른바 '아이 K'의 안락사 신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바 있습니다. 아버지는 "중증으로 아픈 개를 안락사하듯" 아기를 재우고 싶어 했습니다. 히틀러의 주치의 결정으로 그 뜻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브란트는 자신의 행위를 이렇게 정당화했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의료 행위입니다. 그 목적은 전쟁에서 우리 민족의 귀중한 구성원들, 우리 동지들이 겪은 죽음을 보전하는 데 있습니다.
생사를 쥔 권력자
작전이 본격화되기 전, '인간의 외투를 입은 짐승', 즉 정신질환자들을 죽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칼 브란트에게 이것은 또 하나의 범죄, 잔혹한 인체 실험을 저지르기 위한 명분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끔찍한 실험을 현장에서 수행한 것은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천사'로 악명 높은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같은 강제수용소 의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실험용 기니피그로 삼는 연구를 개시한 것은 다름 아닌 히틀러의 개인 의사였습니다.
1942년부터 칼 브란트는 총독관 자격으로 제3제국의 의료 체계 전체를 총괄했습니다. 그는 독일에 진정한 보건부를 세워 국내 모든 의사에 대한 권한을 쥐는 꿈을 꾸었습니다. 실제로 그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지만, 퓌러는 결국 그 이름의 부처를 설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히틀러의 총애에서 밀려났습니다. 앞서 언급한 모렐과의 갈등이 결정적인 몫을 했습니다. 브란트는 고용주에게 다른 의료 보좌관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확신시키려 했지만, 음모는 실패했고 오히려 브란트가 독재자의 측근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1945년 4월 16일, 그 의사는 SS에 체포되었습니다. 이유는 무너져 가는 베를린에서 가족을 데리고 탈출해 미군에게 항복하게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그는 안니 레보른(Anni Rehborn)과 결혼해 아들을 두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5월 2일 히틀러의 후계자 카를 되니츠(Karl Dönitz)의 명령으로 석방되었고, 이내 영국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사진: 퍼블릭 도메인, 뉘른베르크 재판에 선 칼 브란트.
뉘른베르크 재판소 앞에서 그는 안락사 프로그램 운영, 강제 불임 수술,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상대로 한 '잔혹하고 종종 치명적인' 실험 등의 혐의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의사이자 인간으로서,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질렀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 일은 명령이었으며, 군인으로서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사형 선고,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형은 1948년 6월 2일 랜즈베르크 감옥에서 집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