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해 보이는 화학 공장의 사고가 결국 참극으로 번졌습니다. 붉은 독성 구름에 뒤덮인 이탈리아 도시 세베소의 이야기입니다.
1976년 당시 세베소의 인구는 약 1만 7천 명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특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농업 중심의 경제와 수십 개의 지역 상공업체, 몇 곳의 대형 산업 시설이 있을 뿐이었죠. 아무도 근처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연기 구름이 끔찍한 참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폭발적인 혼합물
ICMESA(Industrie Chimiche Meda Società Azionaria)로 불리는 공장은 세베소와 인접한 메다(Meda)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971년부터 이곳에서는 살균제이자 제초제인 2,4,5-트리클로로페놀을 생산했으며, 이후 여러 화합물이 여기서 파생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유독한 헥사클로로펜도 있었는데, 이 물질은 영아용 파우더 성분 등으로 사용되다가 일련의 참사 이후 시장에서 퇴출되었습니다.
2,4,5-트리클로로페놀 생산은 크롬-니켈-몰리브덴 합금으로 만든 용량 10,000리터짜리 반응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교반기(임펠러)로 화학 물질을 섞어 혼합물 전체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고, 가열은 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증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안전장치로는 3,000리터의 물 저장조를 갖춘 냉각기가 있었는데, 필요 시 계통에 물을 쏟아부어 온도를 빠르게 낮출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반응기 굴뚝에는 압력이 3.8bar를 초과하면 터지면서 내용물을 방출해 반응기 파손을 막는 비상 밸브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안전해 보였지만, 판독 가능한 온도계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냉각기는 수동으로만 작동시킬 수 있다는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세베소 - 다이옥신
탱크 안에서는 1,2,4,5-테트라클로로벤젠과 수산화나트륨이 혼합되었습니다. 생산 주기의 마지막 단계는 증류된 에틸렌글리콜을 탱크에서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반응은 158°C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공급되는 수증기는 약 190°C였습니다. 이전 연구들에 따르면 발열 반응은 230°C에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은, 이미 180°C에서 혼합물이 위험한 부산물인 다이옥신(정확히는 2,3,7,8-테트라클로로디벤조-p-다이옥신, TCDD)을 생성하기 시작한다는 점이었습니다. 2004년 빅토르 유셴코 독살 미수 사건에 사용된 것이 바로 이 화학물질로 추정됩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달아 겹치기만 하면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셈입니다.
"꺼버렸으니, 집에 가자"
1976년 이탈리아 법률상 공장들은 주말 전에 가동을 중단해 노동자들이 가족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7월 9일, 생산 주기가 끝나기도 전에 반응기에 열을 공급하던 발전소가 먼저 멈췄습니다. 증기를 밀어내던 터빈의 부하가 줄면서 온도가 급격히 상승해 무려 300°C에 달했습니다!
반응기가 있던 B동의 노동자들 역시 교대 근무를 마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틸렌글리콜을 제거하지 않은 채 교반기를 끄고 증기 공급을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열매체 온도가 크게 올라간 사실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985년, 세베소 참사의 잔류 독성 폐기물을 소각한 바젤 소각장
안타깝게도 발전소에서 공급된 가스는 너무 뜨거워서 반응기 상단부를 국소적으로 계속 가열했습니다. 로터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이 고루 분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혼합물 표면의 온도가 180°C(일부 자료에서는 190°C)까지 올라갔고, 이 조건에서는 위험한 발열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탱크는 점점 더 뜨거워졌고, 마침내 7시간 후 안전 밸브가 터지면서 탱크의 내용물이 녹슨 구름 형태로 굴뚝을 통해 밖으로 분출되었습니다. 약 6톤의 화학물질, 그중 TCDD 1kg이 공중으로 날아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붉은 구름
마침 근처에 있던 공장 직원 한 명이 즉시 달려가 굴뚝을 닫았지만, 참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바람은 구름을 남서쪽으로 밀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TCDD의 첫 번째 피해가 나타났습니다. 하루 뒤에는 세베소에서 야외에서 놀던 아이들과 동물들이 첫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농부들은 작물에 우려스러운 궤양이나 화상 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초기 증상은 장 문제와 고열이었지만, 겉보기에는 공장 사고와 관련이 없어 보였고, ICMESA 경영진은 사건 다음 날에야 지방 당국에 '제초제 누출'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작물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제초제라고만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이틀 뒤 지역 당국은 채소와 곡물 섭취를 금지했습니다. 화학물질이 분출된 지 4일 후에는 아이들에게 피부 화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가축과 소가 죽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사이에 약 3,300마리의 동물이 폐사했습니다.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치료하던 의사들은 이런 심각한 증상의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ICMESA 이사회가 구름 속에 TCDD가 포함되어 있음을 마침내 인정한 것은 10일이 지난 뒤였습니다. 사건 발생 2주 후, 직접적인 피해 지역에 대한 대피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비극적 결과
총 11개 도시가 영향권에 들었고, 위험 지역은 세 개 구역으로 나뉘었습니다. A구역(110헥타르)은 토양 내 TCDD 농도가 제곱미터당 50마이크로그램을 초과하는 지역으로 세베소와 메다의 일부를 포함했으며, 736명이 대피하고 해당 지역 전체가 펜스로 둘러싸였습니다. B구역(270헥타르)에서는 임산부와 어린이가 대피해야 했고 모든 농사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면적 1,400헥타르의 R구역은 '고위험'으로 표시되었고, 미량의 TCDD가 검출되어 가축 사육이 금지되었습니다.

A구역의 자연공원. 오염 물질을 담은 저수지 2개가 지하에 묻혀 있습니다.
결국 제한 조치의 영향을 받은 주민은 36,000명을 넘었습니다. 정부는 처음에 오염 제거 계획에 4,780만 달러 상당의 예산을 배정했지만, 사건 2년 후 그 규모는 세 배로 늘어났습니다. ICMESA의 기술이사 헤르비히 폰 츠벨(Herwig von Zwehl)과 생산이사 파올로 파올레티(Paolo Paoletti)가 체포되었습니다.
TCDD가 먹이사슬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78년까지 80,000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하는 위기 조치가 단행되었습니다. 1982년에 철거된 ICMESA 공장의 잔해를 포함해 총 20만 입방미터의 오염 물질은 A구역에 매립되었습니다. 공장 부지에 남은 화학물질은 방사성 물질 보관용으로 제작된 특수 탱크에 담긴 뒤 스위스로 운송되어 소각되었습니다.
종말론적 풍경
피해자들에 대한 의학 검진은 참사의 처참한 규모를 드러낼 뿐 아니라, TCDD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즉각적인 영향은 주로 염소성 여드름(클로라크네)이었습니다. 불쾌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평생 지속되는 피부 질환이었습니다. 화상, 말초 신경병증, 간 기능 장애도 진단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사고 피해자들이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임산부들은 TCDD 노출 직후 낙태를 권고받았습니다. 거의 500명의 여성 중 낙태를 선택한 사람은 26명뿐이었고, 나머지는 건강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후의 연구에서야 남아들의 정자 수 감소, 신생아의 갑상선 질환 위험 증가가 확인되었습니다.

누출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에는 공원(보스코 델레 퀘르체, Bosco delle Querce)이 조성되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육체적으로만 고통받은 것이 아닙니다. 두 개의 산업 시설, 37개 지역 기업, 61개 농장, 그리고 약 4,000개의 텃밭이 무너지면서 남겨진 정신적·경제적 손실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1984년, A·B구역의 정화가 완료되었다고 발표되었고 건축 허가가 내려졌습니다. ICMESA 공장이 있던 부지에는 스포츠 센터가 들어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