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는 1980~90년대의 전환기,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7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두 차례의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인가?
물가는 하룻밤 사이에 치솟고, 지갑 속과 은행 계좌에 있는 돈의 실질 가치는 줄어든다.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리고, 주택 대출을 포함한 대출 이자는 더욱 비싸진다.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시장경제에서는 어떤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은 오르고, 어떤 것들은 내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가 인플레이션을 말하는 경우는 평균적인 시민에게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광범위하게 상승할 때다.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절에는 "모든 것이 비싸졌지만 기관차만은 싸졌다"는 농담이 유행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개별적인 가격 인하는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상쇄하지 못했다.
가장 교조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인플레이션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인플레이션은 유럽 대부분의 사회에 늘 함께해 왔다. 서방 이웃 나라들에서 최근 나타난 물가 급등 역시 각종 위기 대응 방패(재정 지원책)의 부산물이다. 인플레이션이 통제된 상태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며, 오히려 경제 회복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통제를 벗어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한번 커진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은 극히 어렵다. 초인플레이션은 경제와 가계 모두에 비극이 된다. 폴란드는 비교적 최근에도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제3공화국의 여명기, 그리고 제2공화국 초기였다.
인플레이션에도 비용이 들고, 그것과의 싸움에도 비용이 든다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대에는 물가가 규제되었다. 정부가 직접 가격을 정한 것이다.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의 마지막 정부는 경제 정책을 담당한 자유주의자 미에치스와프 빌체크와 함께 이 메커니즘에서 부분적으로 벗어났다.
사실상 자본주의 건설은 라코프스키 정부가 시작했다. "금지되지 않은 것은 모두 허용된다"는 초자유주의적 경제활동법의 도입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물가 규제도 부분적으로 폐지했지만, 농산물에 한해서였다. 나머지 상품들은 계속 통제되었고, 그 결과 시장에서 좀처럼 구할 수 없었다. 화폐 가치는 떨어져 갔다. 손실을 피하는 방법은 공업 제품이나 경화(달러 등 외화)에 투자하는 것뿐이었다. 잘못 진행된 물가 자유화는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했고, 빈껍데기 화폐를 찍어내 재정 적자를 메우는 정책도 한몫했다.

사실상 자본주의 건설은 라코프스키 정부가 초자유주의적 경제활동법 도입 등을 통해 시작했다.
제3공화국 초창기 폴란드 경제는 월 100%를 넘는 인플레이션으로 마비 상태에 빠졌다. 재정 적자는 GDP의 12%에 달했다. 이에 따라 발체로비치 계획은 물가 상승을 억제함으로써 이후의 체제 개혁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활용된 수단으로는 재정 지출 삭감, 각종 상품 보조금의 폐지, 물가·임금·금리의 자유화, 즈워티의 태환성 확보 등이 있었다. 사회적 비용은 막대했다. 발체로비치 계획의 반대자들은 "치료법이 병 자체보다 해로웠다"고 주장했다. 1990년 말 실업률은 6%였지만, 2년 후에는 16.4%로 치솟았다. 실질 임금은 4분의 1이나 하락했고, GDP는 예상된 5%를 훌쩍 넘는 12%나 감소했다. 결국 초인플레이션을 잡기는 했지만, 물가는 여전히 매월 3~4%(연율 42~60%)씩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시민들에게 이는 실질 임금 하락과 물가 상승을 의미했다. 예컨대 석탄과 가스 가격은 400%, 전기 요금은 300%나 인상되었다. 전체 물가는 예상된 45%가 아닌 무려 80%나 상승했다. 금리 인상은 전통적으로 다음 농사 자금을 대출받아 왔던 농업에 엄청난 어려움을 안겼고, 소규모·대규모 기업들의 고통과 파산으로 이어졌다.
인플레이션과 싸운 그랍스키
제2공화국 정부 역시 막대한 재정 적자와 씨름해야 했다. 적자를 줄이기 위해 화폐를 찍어내는 방법이 동원되었고, 국내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빈껍데기 화폐와 재정 적자는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독일의 초인플레이션과 마르크 환율 붕괴가 추가적인 촉매제로 작용했다. 폴란드 마르크는 휴지 조각이 되어갔다. 1923년에는 최고 액면가가 1,000만 마르크에 달했다(3년 전에는 1만 마르크에 불과했다). 같은 해 미화 1달러의 가치는 500만 마르크였다.
비토스 정부는 어려운 경제 상황을 감당하지 못했다. 1923년 12월, 국민민주당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인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를 수상으로 하는 새 내각이 출범했다. 그랍스키 수상은 법률과 동등한 효력을 지닌 포고령을 발표할 수 있는 권한 등 세임(하원)으로부터 특별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랍스키 내각은 출범 첫날부터 재정 및 통화 개혁에 착수했다.

제2공화국 정부 역시 막대한 재정 적자에 시달렸다. 적자를 줄이기 위해 화폐 발행이 동원되었다.
재정 개혁은 국가 예산에 안정적인 수입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재산세가 도입되었고, 소득세와 기타 직접세가 인상되었다. 정부는 국가 자산 일부를 매각했으며, 가장 수익성이 좋은 산업(주류, 담배, 설탕, 성냥 등)은 국가 전매제로 전환했다. 개혁은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에는 이미 세임이 적자를 고작 10% 수준으로 억제한 예산을 통과시켰다.
통화 개혁을 통해 새 화폐인 폴란드 즈워티가 도입되었다. 기존 화폐는 폴란드 마르크 180만 = 즈워티 1의 비율로 교환되었고, 미화 1달러는 5.18 즈워티였다. 통화 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독립된 폴란드은행과 국립 조폐국이 설립되었다. 개혁은 효력을 발휘했고, 화폐는 안정을 찾았다. 사회적 비용은 컸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출처:
- Sławomir Węglewski, 『폴란드의 경제 개혁 1988–2009』, Financial Observer, 2009년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