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에서도 정신질환을 앓던 황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고전 주간(Week of the Classics)을 맞아 케니슬링크(Kennislink)는 12명의 로마 황제 전기를 집필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트란퀼루스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습니다. 2세기부터 지금까지 그의 선정적인 이야기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내 이름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트란퀼루스. 서기 70년부터 140년까지 살았지. 나는 역사상 최초의 선정주의 저널리스트로 불린다. 내 연대기에는 유명한 로마 황제들의 스캔들로 가득한데, 그중에서도 칼리굴라 황제가 단연 으뜸이다. 그는 잔인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미치광이였으니까."
"정보를 얻기 위해 나는 온갖 사건과 음모가 넘쳐나는 제국 문서 보관소를 뒤졌고, 관련자들의 후손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비록 이것은 나의 해석이지만, 책을 더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스캔들을 지어낼 필요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칼리굴라 황제를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는 서기 4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하지만 그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들은 아직 생생하고 기록도 온전히 남아 있다."
'작은 군화'라는 별명
"칼리굴라는 황제의 본명이 아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장군(기원전 15년~서기 19년)을 따라 자주 다녔다. 장군은 게르마니아와 동방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행군하는 동안 소년은 미니어처 군복을 입었는데, 아버지의 병사들은 그에게 맞춤으로 만든 개방형 군화 '칼리가(caligae)'를 신겨주었다. 이 덕분에 병사들 사이에서 그는 '칼리굴라', 곧 '작은 군화'라는 애칭을 얻었다. 성인이 되어 통치하는 동안 황제는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살았고, 어린 시절의 별명은 주로 후대 역사가들이 사용했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매우 인기가 많았고, 백성들은 그를 숙부인 티베리우스 황제(기원전 42년~서기 37년)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여겼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아마 독살당한 것이리라. 제국 궁정에서는 티베리우스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온갖 음모가 벌어졌다. 배신에 둘러싸인 티베리우스는 씁쓸해졌고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의 고발로 원로원은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인 네로와 드루수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고, 칼리굴라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역시 티베리우스에 의해 추방되었다. 어린 칼리굴라는 세 명의 자매와 함께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칼리굴라는 기괴한 행동을 보였다. 잔인했고, 누이 드루실라를 지나치게 아꼈다. 그녀가 친오빠에게 정조를 빼앗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훗날 드루실라가 21세의 나이로 죽자 칼리굴라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는 모습을 감췄다가 며칠 뒤 야위어 다시 나타났다. 그때 그는 이미 황제였고, 공식적으로 누이를 신격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칼리굴라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신전을 지었고, 기존 우상의 머리를 자신의 머리로 바꾸게 했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너무 앞서갔다. 칼리굴라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자. 열아홉 살 때 인생은 크게 변한다. 티베리우스는 아마 그를 지켜보기 위해 소년을 궁정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게 했다. 티베리우스는 이미 칼리굴라의 잔혹함을 알고 있었다. '나는 로마 백성을 위해 용을 키우고 있다. 태양의 전차가 없어도 세상을 불태울 파에톤을.' 그는 소년에게서 아무런 좋은 점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늙은 황제가 죽자 칼리굴라 외에는 남자 후계자가 없었다. 백성과 병사들은 인기 있던 게르마니쿠스를 잊지 못했고, 그의 아들 칼리굴라에게 완벽한 황제상을 투영했다. 비록 그는 겨우 25살에 불과해 정치적·군사적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갑자기 모든 정치적 권력을 쥐게 된다. 과거의 황제들은 수년간 여러 원로원 직책과 권한을 거치며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즉시 원로원으로부터 '프린켑스(Princeps)', 즉 제1시민이자 제1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칭호는 제국이 명목상 공화제였던 시기(프린키파투스)에 황제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빵과 오락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경기를 개최하고, 돈과 빵을 나누어주고, 추방령을 해제하고, 각종 형벌을 사면하며 인기를 끌었다. 잘못을 저지른 엘리트 계층의 일원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하지만 2년 안에 상황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칼리굴라의 좌우명 '인간은 검소하거나 황제여야 한다'가 발목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는 들어오는 돈보다 연회, 신전, 경기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쓴다. 그는 추가 세금을 부과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수입을 위해 궁전 안에 창관까지 차렸다. 특히 엘리트와 원로원 의원들은 조심해야 했다. 칼리굴라는 잔인하고 예측 불가능해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상관없다.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역사책은 칼리굴라의 만행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는 산 채로 붙잡힌 포로를 원형극장의 야생동물 먹이로 사용했고, 포로와 질투하는 자들의 고문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사람을 죽였다. 칼리굴라의 살인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놀이의 요소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제물을 바치는 종으로 변장한 뒤, 제물 동물 대신 사제를 때려 죽였다. 칼리굴라는 자주 쫓아다니는 여인들에게 자신의 권력만 있다면 그들의 아름다운 목을 한 번의 타격으로 몸통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또 원로원 의원들에게 킬킬 웃으면서 그들의 목숨이 자신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정신 질환
"이 모든 사실을 생각해보면 나는 황제가 병들었다고 확신한다. 그는 창백하고 넓은 머리, 균형 잡히지 않은 체구로 건강하지 못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었다.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 간질을 앓았고, 성인이 된 후에는 악몽과 신경 발작에 시달렸다. 그의 병은 잔인하고 기괴한 행동으로 드러났는데, 그의 특이한 옷차림이 그 예이다. 황제는 무대 의상, 여성 의상, 혹은 로마 시민들에게 낯선 복장으로 등장하곤 했다. 사랑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칼리굴라는 누이를 가장 사랑했지만 그녀는 죽었다. 그의 말 인키타투스도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다. 심지어 개인 저택과 돌봄 인력까지 갖추어졌다. 그는 짐승을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싶어하기까지 했다. 설령 원로원 의원들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칼리굴라가 통치 몇 년 만에 암살된 것은 그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였다. 음모자들은 그가 노름을 하던 중 그를 찔렀고, 이후 그의 아내 카이소니아와 딸까지 죽였다. 이 암살로 '가이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카이사르가 폭력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칼리굴라
오늘날 우리는 이 황제와 그의 광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정신병자였을까? 현대 학자들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라드바우드 대학교 고대사 교수 올리비에 헥스터(Olivier Hekster)는 칼리굴라의 행동을 완화하여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황제는 분명 만행을 저질렀지만, 주로 원로원과 엘리트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원로원에게 자신의 절대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칼리굴라는 어디에서든 그들을 괴롭히고 깎아내렸다.
젊은 나이에 원하던 군사적·정치적 경험 없이 권력에 올랐음에도 칼리굴라는 여전히 원로원 위에 서 있었고, 그 사실을 원로원에 각인시키고 싶어 했다. 그의 만행들은 진짜든 과장됐든 지어낸 것이든, 주로 후대 작가들에 의해 언급되었고 연극과 역사서술에 활용되었다. 고대 문헌에서 이에 대한 언급은 의외로 드물다. 따라서 선정성을 추구하는 수에토니우스는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기록가는 아니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귀중한 원천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