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면 질투심이 올라오지 않을 수 없다. 합스부르크 가문, 영국 왕실, 부르봉 가문의 화려한 컬렉션은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매료시킨다. 빈에는 '예술과 기적의 방'이 무려 40개에 가까운 전시실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폴란드에 남은 것은 복원된 성과 회수된 태피스트리 몇 점뿐이다. 그러나 한때는 정반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562년, 교황 특사 베르나르도 봉조반니는 폴란드 방문 소감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마지막 야기에우워 왕조의 군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선보인 것들을 앞두고 이탈리아로 돌아갈 때까지 말문이 막혔다고 전한다.
"국왕은 훌륭한 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빌뉴스에는 아름답게 제작된 대포 180문과 셀 수 없이 많은 소형 화포가 있으며, 국왕은 이에 남다른 애착을 지니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놀라운 갑옷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네 벌은 단연 돋보입니다. 특히 조상들이 모스크바를 상대로 거둔 모든 승전 기록을 은으로 섬세하게 새긴 갑옷이 그렇습니다. 그 갑옷의 값은 6천 스쿠도였으며, 나머지 갑옷들에도 다른 승전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 컬렉션은 왕실 소장품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보물의 대부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특사에게 "폴란드인들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보유했는지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귀족들의 심리를 잘 헤아리던 그는, 세임(폴란드 의회) 의원들이 세금 인상에 동의하기는커녕 오히려 왕에게 재산 매각을 강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파산한 왕의 역할을 택했다.

위대함을 담은 열여섯 개의 상자
"한 방에는 거의 방 전체를 차지하는 커다란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 길이 2큐빗(약 1미터), 너비 1.5큐빗 크기의 상자 열여섯 개가 놓여 있었고, 모두 보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봉조반니는 계속해서 수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상세히 묘사했다.

1546년 제작된 메달 속 보나 스포르차. 그녀가 없었다면 야기에우워 왕조의 위대한 보물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국왕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물건들, 즉 분수, 사람 크기의 인형이 달린 시계, 오르간과 각종 악기"를 언급했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자신의 치수에 맞춰 파란 표식이 그려진 지구본"까지 소유했으며, "에메랄드와 루비, 커다란 다이아몬드로 가득한 모자"도 보유하고 있었다.
특사는 모자 하나의 가치만 최소 30만 스쿠도로 평가했다. 열여섯 개 상자 중 네 개에 담긴 진품의 가치는 50만 스쿠도에 달했다.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으로 큰 금액이다. 스쿠도는 고순도 금화였다.
스쿠도의 가치는 발행처마다 달랐지만, 봉조반니가 염두에 둔 것은 아마 교황령 화폐였을 것이다. 역사가 헨리크 보이티스키에 따르면 그런 스쿠도 하나는 "폴란드 플로린 조금 넘는" 가치를 지녔다. 즉 왕의 모자 하나로 크라쿠프의 도시 주택 2~3백 채를 살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도시 하나와 그 근교 몇 곳이 통째로 들어가는 값이다.
세상이 본 적 없는 막대한 재산
특사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베네치아에서도, 로마에서도, 어떤 왕실 보물고에서도 폴란드 국왕의 부와 견줄 만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과거 야기에우워 왕조 재산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가문 중 가장 부유한 이는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였다. 자신의 재능과 결단력 덕분에 그녀는 유럽 대륙에서 비할 데 없는 재산을 쌓아 올렸다. 남편 지그문트 1세(스타리)의 죽음 이후 아들과 격한 갈등을 빚으면서, 보나는 이탈리아로 떠나 자신의 영지인 바리 공국에서 말년을 보내기로 했다. 태후는 진귀품으로 가득 찬 수레 24대를 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보나 스포르차의 보석 상자.
이 어마어마한 보물과 여왕의 상상을 초월하는 재정적 저력은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오랫동안 몰래 협력해 온 최측근 잔 로렌초 파파코다에게 독살당했는데, 파파코다는 게르민 왕조의 밀명을 받고 움직이고 있었다.
보물 24대의 수레
귀중품의 압도적 대부분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고, 오늘날 폴란드 문화가 정확히 무엇을 잃었는지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파파코다가 그녀를 살해한 지 겨우 21일 만에 재산 목록 작성이 시작되었다. 당시 바리 성에는 현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운반이나 처분이 쉽지 않은 동산들은 상당수 남아 있었다. 마그달레나 피보츠카가 검토한 목록에는 반지 270개, 목걸이 30개, 펜던트 80개, 진주 줄 40개, 의복 장식용 산보석 128개, 팔찌 13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여왕은 심지어 소장품에 유니콘 뿔 조각(실제로는 아마 나르왈의 엄니였을 것)까지 갖고 있었다.

바리 성의 안뜰. 보나 스포르차는 바로 이 음침한 저택에서 생을 마감했다(사진: 카밀 야니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광인처럼 집요하게 어머니 재산의 흔적이라도 되찾으려 수년간 싸웠다. 보나의 관을 덮었던 단 하나의 "이불"에 대해 물은 편지까지 전해진다. 결국 논쟁에 지친 합스부르크 가문은 폴란드 국왕에게 보물 상자 네 개를 돌려주었다. 제국 가문은 훨씬 더 큰 몫을 손에 넣었고, 이것이 훗날 '예술과 기적의 방' 건립의 추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폴란드에도 '기적의 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1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가문 소장의 진귀품·골동품 컬렉션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쿤스트캄머(Kunstkammer)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며,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품의 핵심 골격을 이룬다.
수십 개의 방에는 다양한 전시품이 모여 있다. 중세의 그리핀 모양 물병부터 조각 걸작과 실제 동물을 본떠 만든 밀랍 모형, 타조 알이 주역을 맡은 기발한 구성물, 그리고 손에 총을 든 은도금 곰 인형 같은 '근대 로봇'까지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이 놀라운 컬렉션을 거닐다 보면, 1572년 당시 합스부르크 컬렉션조차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거대한 '기적의 방'의 풍부함과 가치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국왕은 평생을 보물 수집과 어머니가 쌓아 온 재산 회복에 바쳤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헛되이 끝나고 야기에우워 왕조의 위대한 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은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