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푸틴이 차르의 방식을 펼친다? '녹색 인간'은 이미 130년 전에 있었다!

불가리아가 러시아의 뜻을 거스르자 차르의 첩자들이 움직였습니다. 황제의 '녹색 인간'들은 왕좌에 앉혀놓은 통치자를 납치했죠. 그리고 그 왕자는 – 물론 – 폴란드 혈통이 섞인 인물이었습니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열강들은 불가리아 공국의 설립을 허용했습니다. 이제 적임자만 찾으면 됐죠. 정치적 오디션에서 승리한 이는 겨우 22세의 알렉산더 바텐베르크였습니다. 헤센 공작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러시아와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차르 군대에 복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알렉산더는 부분적으로 폴란드인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폴란드 백작 얀 마우리치 하우케 장군의 딸 율리아 하우케였습니다. 이 장군은 코시치우슈코 봉기에 참전하고 나폴레옹 휘하에서도 싸웠지만, 1830년 11월 봉기는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봉기군은 그를 총탄으로 살해했고, 이후 러시아 당국은 이 불행한 영웅을 자신들의 영웅으로 재단했습니다. 관대한 차르는 그의 딸 율리아마저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알렉산더 바텐베르크를 '자기 편', 즉 꼭두각시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크게 계산을 잘못한 것이었습니다.

푸틴이 차르의 방식을 펼친다?  녹색 인간 은 이미 130년 전에 있었다!

모리치 하우케 장군 – 불가리아 공작의 할아버지인 폴란드 백작 (출처: 퍼블릭 도메인)

한밤중의 쿠데타

젊은 공작은 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차르와 상의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려 했습니다! 물론 그는 러시아, 터키, 그리고 주변 소국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웃 나라들과 보호국과의 갈등을 감수하면서라도 불가리아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다소 무모한 태도였고,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1885년 가을, 불가리아는 세르비아 – 그러니까 러시아의 위성국 – 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할아버지의 피가 발동한 걸까요?) 차르를 외면하고 그의 도움조차 기다리지 않은 채 스스로 침략자와 맞섰습니다. 승리는 공작의 지위를 한층 강화했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남남처럼 보이는 서방 출신의 '공수부대원'에 불과했지만, 이 승리는 그를 진정한 불가리아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바텐베르크는 강해졌지만, 러시아 입장에서는 여전히 충분히 강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나라에는 '동맹국'이라는 이름의 차르 군인들이 넘쳐났고, 군대 안에도 친러파가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발판 삼아 공작에 대항하는 제5열, 곧 19세기판 '녹색 인간'이 조직되었습니다. 바로 이들 때문에 1885년의 영광 직후 알렉산더 바텐베르크는 처참한 굴욕을 맛보게 됩니다. 1886년 여름, 러시아 첩자들이… 통치자를 납치한 것입니다!

푸틴이 차르의 방식을 펼친다?  녹색 인간 은 이미 130년 전에 있었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3세. 개인적으로는 불가리아 공작 알렉산더 바텐베르크의 사촌이었지만, 그에게 '녹색 인간'을 보내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이반 크람스코이 초상화 일부, 퍼블릭 도메인)

"8년간 불가리아를 통치하며 신하들뿐 아니라 유럽의 호평까지 받았고, 세르비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 1886년 8월 20일 밤 궁전에서 갑자기 납치된 뒤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발견된 유일한 단서는 공원을 지나 다나우 강변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난 것이죠. 이 사건에 러시아의 손길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라고 당대 스캔들의 연대기를 집필한 마리안 로스코 보그다노비치는 기록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의혹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 [로마노프]가 예카테리나 2세가 그로드노 세임에서 폴란드 애국자들에게 썼던 방식을 유럽에 상기시키려 든다는 게, 19세기에도 러시아 정책이 이토록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가리아 공작 납치 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아니라… 리비우에서였습니다!

목욕가운과 실내화 차림의 영웅

그곳 오스트리아 당국은 170km 떨어진 포드보워치스카 국경에서 "모스크바인들이 자신을 국경에 버렸다. 목욕가운과 실내화 차림에 옷도, 한 푼의 돈도 없이 버려졌으며 도움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공작 알렉산더의 전보를 접수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자랑스러운 불가리아의 통치자는 앞서 말한 그 차림새 그대로 "역 카페테리아에서 외상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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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타르 카라스토야노프가 1880년경 그린 불가리아 공작 알렉산더 바텐베르크의 초상화 (출처: 퍼블릭 도메인)

이것은 참으로 처참한 굴욕이었습니다. 바텐베르크의 명성은 리비우 시내에 도착한 후에야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곳곳에서 "불가리아 만세!" 그리고… "폴란드 만세!"라는 함성을 들었습니다. 수천 명이 그를 환호했습니다. "포드보워치스카 도착 소식이 리비우로 빠르게 퍼지면서 군중들이 성모 광장에 모여들었고, 그는 그 미완성의 차림새로도 몇 번이고 발코니로 나가야 할 정도의 환영을 받았습니다"라고 마리안 로스코 보그다노비치는 전했습니다. "이렇게 리비우는 2주 동안 유럽의 관심이 집중되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전보가 소식을 전 세계에 퍼뜨렸고, 언론들은 상세 보도를 위해 특파원들을 리비우로 급파했습니다."

공작이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들려준 이야기 역시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8월 20일 밤, '녹색 인간'들이 경비병들을 매수하거나 겁을 준 뒤 통치자의 침실에 난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침입자들은 승진 인사를 주도한 것에 대한 복수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통치자에게 퇴위를 강요했습니다! 총검에 둘러싸이고 머리에 리볼버를 겨눈 채 바텐베르크는 서류에 서명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불가리아를 구하소서! 알렉산더"라고 공작은 서명했습니다.

이후 납치범들은 그를 궁전에서 끌어냈습니다. 먼저 마차로, 이어서 배로 공작은 러시아 항구 도시 레니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옮겨진 그는 포드보워치스카에 내던져진 채 운명에 맡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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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소피아에 위치한 바텐베르크 영묘 (사진: Plamen Agov, CC ASA 3.0 라이선스)

알렉산더와 알렉산드르 3세

불가리아 대표단이 공작을 맞이하러 리비우에 왔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듯, 소피아로의 귀환은 바텐베르크 본인과 불가리아에 더 큰 소용돌이를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감춘 채 공작은 차르 알렉산드르 3세 로마노프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황제께서 자신의 귀국을 괜찮게 여기시는지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답장을 받지 못한 그는 결국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한편 불가리아에서 그의 동맹들은 친러파와 그 후원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차르 첩자들과의 충돌이 벌어졌고, 공작 암살 음모의 배후 조직자들이 발각되었습니다. 일부는 감옥에 갇혔고, 일부는 살해당했습니다. 불가리아는 러시아의 겸손한 청원자로만 남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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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요한나와 아들 아센과 함께한 알렉산더 – 사망 2년 전의 모습 (출처: 퍼블릭 도메인)

공작은 환호 속에 맞이받았지만, 그 기쁨은 분명히 성급한 것이었습니다. 며칠 뒤 차르가 마침내 바텐베르크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당신의 불가리아 귀환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폐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공작에게는 충분히 강력한 동맹이 없었고, 여전히 위험한 터키의 그늘 아래 놓인 나라는 러시아와의 정면 충돌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좋든 싫든, 공작은 결국 1886년 9월 6일 퇴위했습니다.

이후 그는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복무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오페라 가수 요한나 로이징거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신분을 초월한 결혼이라는 비판이 있었을까요? 최근의 시련을 겪은 바텐베르크는 세간의 시선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행복은 그에게 오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1893년, 그는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과 1년 뒤에는 차르 알렉산드르 3세 역시 신장염으로 사망했습니다. '녹색 인간'의 힘으로 유럽 정치를 흔든 최초의 러시아 통치자. 그가 최초였지만, 결코 마지막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