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제시된 동부 국경선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상당 부분을 새로 태어난 폴란드에게서 빼앗았다. 그런데 이 선의 획정자는 그 이름을 딴 조지 커즌 경이 아니었다. 신생 국가의 영토 축소 구상의 배후에는 의외로 한 명의 폴란드 출신 망명자가 있었다.
루드비크 베른스타인(니에미로프스키)은 볼라 오크제이스카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오랜 봉기 전통을 이어왔는데, 할아버지 야쿠프 하임 베른스타인은 1863년 1월 봉기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자신 역시 어린 시절부터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르침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1907년 영국으로 건너가 정착한 뒤에는 뿌리에서 스스로를 과감히 끊어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폴란드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를 기억할 때마다 씁쓸해했으며, 특히 로만 드모프스키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 정치 세력 일각과는 수년간 공방을 주고받으며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결속력 있고 강한" 폴란드
1918년 3월 말, 니에미로프스키는 영국 시민권자 '루이스 네이미어'라는 이름으로 외무부 근무를 시작했다. 1920년 4월 30일까지 그는 폴란드 및 중동부 유럽 담당 전문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폴란드의 영토 주장, 특히 그가 미워하던 드모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국민위원회가 제안한 형태에는 철저히 맞섰다.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의 바르토미에이 루신에 따르면, 1918년과 1919년이 교차하는 무렵부터 그는 부크 강과 산 강을 기준으로 하는 폴란드 동부 국경안을 본격적으로 밀기 시작했다.
(...) 1918년 12월 9일자와 1919년 1월 7일자 각서에서 그는 재탄생한 폴란드 공화국의 동부 국경에 대한 견해도 함께 밝혔다. 그의 구상에 따르면 국경은 두 개의 강, 즉 부크 강과 산 강을 기준으로 삼아야 했다. (...) 그는 "결속력 있고 강한" 폴란드 건설을 지지했다. 이는 곧 옛 폴란드 입헌왕국과 비슷한 형태의 '민족지학적' 폴란드를 의미했다.
제안된 국경선은 옛 왕국과 동프로이센 사이의 국경 지점에서 시작해 수발키 북동쪽으로 그로드노까지 이어진 뒤, 부크 강을 따라 남하하여 옛 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 삼국 접경 지점에 도달하고, 여기서 산 강을 거쳐 "옛 갈리치아-헝가리 국경"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루드비크 베른스타인이 태어난 작은 마을 볼라 오크제이스카는 또 다른 위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를 배출하기도 했다. 사진은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다. (사진: Jackowy, CC BY-SA 4.0)
네이미어는 동부 갈리치아 문제에서도 폴란드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는 이 땅을 우크라이나나 체코슬로바키아에 넘겨줄 것을 제안했다. 이 지역의 폴란드 귀속을 추진하던 영국 군부 인사들과도 계속 대립했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권은 점점 강해졌다. 분쟁 지역의 인구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이 영국 측에 유용하게 쓰이면서, 폴란드의 영토 요구를 깎아내리는 데 적극 활용되었던 것이다. 더모트 튜링이 저서 『XYZ: 에니그마 코드 해독의 진짜 이야기』에서 남긴 평가는 다음과 같다.
1920년 그는 외무부의 폴란드 지리 전문가였다. 국제 평화회의에서 다루기 힘든 민족들을 지도 위의 선 하나로 처리하는 것이 영국의 전통이었고, 네이미어는 연필을 아끼지 않았다.
스파 회담
그런 가운데 1920년 7월, 갓 독립한 폴란드 공화국은 국경 확정도 되기 전에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붉은 군대가 서쪽으로 끝없이 밀려왔고, 저지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이윽고 수도 바르샤바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 총리는 벨기에 스파에서 회담 중이던 열강 대표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0일, 그랍스키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군을 1919년 12월 8일자 선까지 후퇴시키고,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 넘기며, 이웃 나라들과의 국경 문제는 국제회의의 결정에 따르라는 요구였다. 하루 뒤인 7월 11일, 영국 외무장관 조지 커즌 경은 소련 측에 휴전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더모트 튜링에 따르면, 그 안에는 양측 간의 휴전선 안이 담겨 있었다.
영국은 폴란드-러시아 국경안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폴란드 동부 국경 문제를 해결하고 전쟁을 신속히 종식시킬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 선은 로이드 조지 정부의 외무장관, 곧 커즌 경의 이름을 따 '커즌 선'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 선의 작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은 꽤 불공평한 일이다. 게다가 이 선이 폴란드 출신 망명자의 손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점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서한에 표시된 선은 북쪽의 그로드노에서 출발해 브레스트를 지나 흐루비에슈프 동쪽, 라바 루스카 서쪽, 프셰미실 동쪽을 거쳐 카르파티아산맥까지 이어졌다. 실제로 이 선의 상당 부분은 니에미로프스키가 이미 몇 달 전 외무부를 떠났음에도 그의 구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니에미로프스키가 획정한 커존 선을 알리는 반공산주의 전단. (사진: 퍼블릭 도메인)
아마도 지도 위에 국경의 경로를 직접 그린 사람도 바로 그였을 것이다. 남쪽 구간, 즉 동부 갈리치아 구간 역시 베르사유 회의 때 이를 위해 설치된 캉봉 위원회가 마련한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중 폴란드에 덜 유리한 안이 선택되었다. 그 결과 리비우와 보리슬라브 유전 지대가 폴란드 영토 밖에 남게 되었다.
물론 외무부 고문에 불과한 니에미로프스키 개인이 그러한 국경을 소련에 제안하자는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옛 동부 영토 일부를 포기하라고 주장하며 폴란드 공화국의 부활에 반대하는 논거를 정치인들에게 공급한 것은 분명하다. 지형과 현지 상황에 밝은 그의 전문성 덕분에 그는 영국 구상의 '설계자 겸 집행자'가 될 수 있었다.
1920년 당시 커존 선은 최종 채택되지 않았다. 폴란드군이 볼셰비키를 물리치고 동부에서 자신들에게 훨씬 유리한 국경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은 4분의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종반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빅3'의 결정에 힘입어 사소한 수정만을 거친 채 실효적으로 확정되고 말았다.
참고 자료: 더모트 튜링, 『XYZ: 에니그마 코드 해독의 진짜 이야기』; 바르토미에이 루신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연구 논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