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일본판 에니그마 '퍼플':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바꾼 잊혀진 암호 기계

일본판 에니그마 '퍼플':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바꾼 잊혀진 암호 기계

에니그마(Enigma)라는 이름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만든 그 '형제 기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미국은 결국 이 암호를 해독해냈지만, 그 덕분에 최악의 사태까지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퍼플(Purple)' 메시지는 연합국에게 가장 귀중한 비밀 정보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은 바다에서 점차 위상을 높여가던 나라였습니다. 1905년에 끝난 러일 전쟁의 승리 이후 세계 열강 반열에 올랐고,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 편으로 참전하면서 영토 확장 등을 통해 국제적 지위는 한층 더 높아졌습니다. 아시아에서 자국의 이해관계가 일본과 충돌하던 미국은 빠르게 이 나라를 미래의 경쟁자로 인식했습니다.

잠재적 적이라면 최대한 면밀히 감시해야 마땅했습니다. 첫 번째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23년이었습니다. 리자 먼디(Liza Mundy)가 저서 『사이퍼 걸스(Code Girls)』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뉴욕의 해군 정보 요원들은 일본 총영사의 집무실에서 1918년판 암호책(일명 '레드 북')을 훔쳐 모든 페이지를 촬영했습니다. 이 자료들은 전문가들의 손에 들어갔고, 마침내 아그네스 메이어 드리스콜(Agnes Meyer Driscoll)의 책상에 놓였습니다.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일하던 이 해독 전문가는 첫 암호를 깨냈고, 이후 전간기에 일본이 사용하던 여러 암호를 연달아 해독해냈습니다.

이어서 '블루 북'과 '오렌지(Orange)' 암호 기계(M-1)가 개발되었고, 마침내 진보된 'A'형 암호 기계(미군 코드명 '레드(Red)')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일본은 다시 한번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있었습니다.

일본의 신형 'B'형 암호 기계(미국 암호학자들이 붙인 코드명이 바로 '퍼플'입니다)는 이전 장치들과 작동 방식이 달랐고 훨씬 복잡했습니다. 군사 역사학자 브와디스와프 코자추크(Władysław Kozaczuk)에 따르면, 이 로터식 기계는 일본이 독일로부터 구입해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개조한 에니그마 암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퍼플'로 암호화된 최초의 가로챈 통신문은 1939년 3월 주바르샤바 일본대사관에서 발신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합국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일본판 에니그마  퍼플 :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바꾼 잊혀진 암호 기계

미국 국립암호학 박물관에 소장된 아그네스 메이어 드리스콜의 사진(사진 출처: Ryan Somma, CC BY 2.0 라이선스)

깨뜨릴 수 없는 암호의 벽?

새 장치는 극비로 취급되었고, 워싱턴, 베를린, 런던, 파리, 모스크바, 로마, 제네바, 브뤼셀, 베이징 등 제국의 핵심 대사관에만 지급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하자 미국은 거대한 벽에 부딪혔습니다. 영국 암호학자들은 '퍼플' 암호는 애초에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빠르게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몇 달 뒤인 1940년 가을, 미국이 암호를 해독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영국인들은 깊은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퍼플' 암호가 정복되기 전까지 미국 암호학자들은 각 대사관에 새 기계를 설치하는 일본 기술자의 동선을 좇으며 점점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요? 일본 기술자가 설치 작업을 마치면 해당 공관의 정보를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분석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몇 달 동안 가로챈 메시지를 도표로 옮겨 적었고, 일본이 두 종류의 암호로 동일한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세밀하게 비교하며 패턴과 유사점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이미 해독된 소량의 문서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돌파구는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해독 전문가들에겐 대략적인 가설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실마리는 없었습니다. 만약 또 한 명의 여성이 없었다면, 이들은 오랫동안 교착 상태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녀는 바로 『사이퍼 걸스』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1940년 9월 20일, 그들의 동료 제네비브 그로트얀(Genevieve Grotjan)이 암호학자 그룹이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와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입을 열었습니다.

일본판 에니그마  퍼플 :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바꾼 잊혀진 암호 기계

그녀는 오랫동안 암호 해독 작업에 매달려 왔습니다. 대학 시절 뛰어난 수학자로 주목받았지만, 어느 대학도 수학과에 채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요. 결국 그녀는 작은 연방 기관에서 철도 연금을 계산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의무적으로 치른 수학 시험의 결과가 정부 관료의 눈길을 끌었고, 그녀는 암호 업무 부서로 스카웃되었습니다. 미군이 내린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바로 제네비브가 1940년 9월 20일 '퍼플'의 암호를 해독해낸 것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가 최고위 인사 소수에게는 일주일간의 검증 끝에 이 성과가 보고되었습니다. 두 주 뒤에는 미국 전문가들이 제작한, 일본의 에니그마와 동일한 성능의 기계가 암호국에서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작자들이 원본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본 장치의 첫 실물(정확히는 그 잔해)을 미국이 손에 넣은 것은 1945년, 베를린 주재 일본대사관에서였습니다.

암호 기계가 가동되자 미군은 일본 외교관들의 보고로 넘쳐나게 됩니다. 추축국 회담 내용은 물론, 베를린 주재 대사가 보낸 독일의 전쟁 수행 상황과 히틀러의 계획에 대한 상세 보고서까지 말입니다. 리자 먼디는 『사이퍼 걸스』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쟁 기간 대부분 동안, 연합국이 유럽—특히 독일—에서 무엇이 생각되고 논의되었는지, 무엇이 매입·개발·생산되었는지에 관한 최고의 정보를 제공한 것은 바로 일본의 '퍼플' 암호 기계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무엇보다 대독일제국 주재 일본대사 히로시 오시마(Hiroshi Ōshima) 남작 덕분이었습니다. 군인 출신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오시마는 총통과 다양한 주제로 담화를 나눴습니다. 그는 나치를 경모했고, 독일 곳곳의 시설을 시찰한 뒤 도쿄로 길고 학구적이며 정확한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일본판 에니그마  퍼플 :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바꾼 잊혀진 암호 기계

미국이 재현한 '퍼플' 암호 기계(사진 출처: Mark Pellegrini, CC BY-SA 2.5 라이선스)

하지만 일본이 주고받는 가장 기밀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해도, 미국이 심장부에 가하는 타격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방대한 정보량 자체가 가장 중요한 신호를 가려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부디언스키(Stephen Budiansky)가 제2차 세계대전 암호 해독사를 다룬 저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1941년 12월 3일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으로 '퍼플'로 암호화된 통신문이 발송되었는데, 그 내용은 암호책과 가동 중인 두 대의 '퍼플' 기계 중 하나를 파괴하라는 지시였습니다. 분석관들은 이 정보를 읽는 즉시 경고를 전하러 정보부로 달려갔고, 12월 6일 밤부터 7일로 넘어가는 시점에는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전해졌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미 미국 연안을 향해 진격 중이던 제국 해군이 사용하던 암호는 여전히 그들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기 때문입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진주만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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