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던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 대왕은 평생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무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이 글에서는 그가 정복 사업을 진행하며 치른 가장 중요한 전투들을 살펴봅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기원전 382년 펠라 출생 ~ 기원전 336년 아에가이 사망)는 아들에게 강력한 군대와 개혁을 통해 튼튼해진 국가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리스 도시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입지를 다진 후, 야심 찬 정략가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정복에 나섰습니다. 그는 전투 중에도 망설임 없이 헤타이로이(왕실 기병대)를 이끌며 최전선에 직접 서곤 했습니다. 그의 왕국이 최전성기에 이르렀을 때 영토는 무려 5,000킬로미터에 달했습니다.
페르시아 원정은 물론 가장 긴 정복 시기였습니다.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제국 간의 물자, 병력 동원력, 영토 규모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알렉산더의 원정은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군사적 대업일지도 모릅니다.
크시슈토프 나브로트카의 알렉산더 대왕 연구 저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점은, 3천 년의 이란 문자 역사 속에서 이 땅이 서방으로부터 성공적으로 공격당해 정복당한 것은 단 두 번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페르시아 땅에서 알렉산더는 완벽한 지휘 능력을 증명하는 일련의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페르시아에서 벌어진 격돌들
그라니코스 전투(기원전 334년)
당시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다리우스 왕의 군대와의 첫 교전은 그라니코스 강에서 벌어졌습니다. 알렉산더는 소수의 기병만 강을 건너 보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미끼용 기만 작전이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이 이 공격을 막아낸 순간, 마케도니아의 지휘관은 자신의 애마 부케팔로스를 타고 적진 곧바로 돌격을 감행합니다. 이때 그는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패배하여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알렉산더는 기병 6,000명과 보병 43,000명을 이끌었고, 상대는 그리스 용병 5,000명을 포함해 기병 15,000명과 보병 15,000명을 배치했습니다.

그라니코스 전투는 아시아에서의 연속적인 승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의 군대는 다른 페르시아 도시들을 공격해 나갔고, 마침내 11월에 다리우스 3세와 재차 마주하게 됩니다. 양측 군대는 고르디온 근처에 집결했고, 전투는 이소스 만의 피나로스 강 위 좁은 지협에서 벌어졌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지형을 활용하고 강 위에 방책을 쌓아 진지를 보강했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약 6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나, 현대 학자들은 이 수치가 크게 과장된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는 다리우스가 약 10만 명을 거느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렉산더는 또다시 기습 전술에 걸었습니다. 그는 맹렬한 돌격을 이끌고 페르시아 우익으로 곧장 짓쳐 들어갔습니다. 수비군은 화살 한 차례를 쏜 뒤 도망쳤습니다.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적진을 돌파해 중앙에 위치한 다리우스의 호위대와 그의 휘하에서 싸우던 그리스 용병들에게 덮쳤습니다. 페르시아 왕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알렉산더 본인도 가벼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포로로 잡히는 것을 두려워한 다리우스는 도주했고, 강 쪽에서 마케도니아 지원군이 합류하면서 승리는 확정되었습니다.
티레 공성전
페르시아를 행진하던 중 알렉산더는 주민들이 끝까지 저항을 택한 단 한 도시와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섬 위에 위치하고 대규모 함대를 보유한 티레였습니다. 공성전은 6개월간 이어졌으며, 그동안 알렉산더의 병사들은 해안을 잇는 방파제를 축조하고 약 200척의 배를 건조했습니다. 공성 기계로 성벽 일부를 파괴하자 마케도니아군은 먼저 방파제 쪽에서, 이어서 함선 갑판에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결국 도시는 함락되었고, 남자들은 살해당하고 여성과 아이들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가우가멜라 전투(기원전 331년)
이윽고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또 다른 대결이 예정됩니다. 두 지도자는 기원전 331년 재차 만났는데, 페르시아 왕은 새로운 군대를 조집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약 20만 명(낫을 장착한 전차 200대 포함)을 일으켰고, 말의 수는 학자들 사이에서 45~160마리로 의견이 분분하며, 페르시아군은 전투 코끼리 15마리까지 운용했습니다. 반면 알렉산더의 병력은 약 4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교전은 가우가멜라 인근에서 벌어졌는데(작은 마을 이름이기도 한 가우가멜라 때문에 때로 아르벨라 전투라고도 불립니다), 평탄한 지형은 다리우스의 압도적 병력 우위에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또다시 그를 능가했습니다. 그는 최정예 기병들과 함께 우익 방향으로 질주하며, 움직임에 반응하는 페르시아 대형을 흩어뜨렸습니다. 이후 소수 병력을 엄호로 남겨두고, 이렇게 생긴 적진의 틈새를 향해 강타했습니다. 군대가 둘로 갈라지는 것을 본 다리우스는 철수를 결심했고, 이는 페르시아군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마케도니아군이 허술해진 측면을 틈타 목숨만은 건졌습니다.

가우가멜라에서 돌격하는 페르시아 낫 전차 부대
알렉산더는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의 왕관을 손에 넣었지만, 페르시아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정복자는 왕 다리우스를 추격하며 자그로스 산맥 깊숙이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병력을 분할해 파르메니온에게는 위험한 산악 지형을 우회하게 하고, 자신은 정예 소수 부대와 함께 깊숙이 진입했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페르세폴리스에 도달하고자 했지만,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 문(Persian Gate)'이라 불리는 계곡에 매복을 설치해 그를 막으려 했습니다.
유일했던 후퇴
통행로를 둘러싼 비탈면에는 궁수들이 늘어서 있었고, 아리오바르자네스가 지휘하는 약 4만 명의 병력이 알렉산더의 진격을 막았습니다. 화살 비바람 속에 마케도니아군은 공황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알렉산더 대왕이 후퇴를 명령한 처음이자 유일한 순간이었습니다. 피해는 막대했고, 마케도니아의 지도자는 심각한 딜레마에 직면했습니다. 좁고 위험한 통로를 다시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귀중한 시간을 들여 산을 우회해 파르메니온과 합류할 것인가.

많은 역사학자들은 히다스페스 전투를 알렉산더의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포로로 잡았던 페르시아인들이 세 번째 선택지를 밝혀주었습니다. 바로 방어군이 배비하지 않은 산길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지체 없이 밤을 틈타 위험한 바위길을 따라 적의 후방으로 이동했습니다. 다음 날인 기원전 330년 1월 20일, 페르시아 진영은 후방에서 공격당했고 마케도니아군은 피로 눈물나게 복수를 완수했습니다. 이 유사성 때문에 이 전투는 종종 '페르시아판 테르모필레'라고 불립니다. 지휘관 아리오바르자네스의 최후에 대해 역사가들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도주해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설과 전투 중 전사했다는 설이 공존합니다.
절정을 장식한 승리
하지만 알렉산더의 가장 위대한 군사적 위업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기원전 326년 인도 원정 중 파우라바족의 왕 포루스와의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마케도니아군은 5만 명이었고, 상대는 6만 명에 전투 코끼리 수십 마리까지 갖춘 대군이었습니다!
교전은 히다스페스 강(오늘날의 젤룸 강)에서 벌어졌고, 양측 지휘관은 강줄기를 따라 병력을 전개하며 서로 건너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빠른 물살과 험난한 도하 조건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바로 그 기동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그는 약 12,000명의 병사를 데리고 밤사이 강 상류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즉석 뗏목을 이용해 강을 건넜습니다.
한편 그의 부하 크라테로스는 도하 시도를 하는 척하며 포루스의 군대를 끊임없이 긴장시켰습니다. 어둠이 내리자 긴장감이 풀리고, 포루스 쪽에서는 밤에 공격이 시도될 거라고 기대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군대는 이미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포루스의 아들, 어린 포루스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를 격파한 뒤 그들은 진격을 계속했습니다.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전투 코끼리들이 아군과 적군 할 것 없이 초토화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알렉산더와 크라테로스는 포루스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고, 포루스는 항복했습니다.
알렉산더의 최고 업적으로 널리 평가받는 이 전투는, 동시에 그의 마지막 대승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불만이 고조된 군대가 곧 지도자에게 귀환을 요구했습니다. 무적의 마케도니아인은 더 많은 원정을 계획했지만 그것은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323년 그는 바빌론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의 원인은 오늘날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