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불로불사를 향한 인류의 탐구: 미라에서 냉동 보존까지

내세에서의 영생 약속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사람들은 고대부터 '지금, 여기'에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불멸에 대한 갈망은 아마도 인류가 지구에 존재한 시간만큼이나 오래된 욕망일 것입니다. 이미 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매우 실용적인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지구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곧바로 다른 가능성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운명을 속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불멸이라고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 영혼이 죽은 육체 안에도 머문다고 여겼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영혼의 집인 육체가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고, 그 위에 기념비적인 피라미드가 우뚝 서는 무덤을 축조했습니다. 무덤에는 일상용품까지 함께 안치했으며, 모든 것이 견고하고 파괴되지 않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이해된 불멸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으며, 특히 파라오는 물론 사제와 궁정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 대가로 수많은 건축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불로불사를 향한 인류의 탐구: 미라에서 냉동 보존까지

불멸에 대한 갈망은 인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에게서 불멸뿐 아니라 미모와 영원한 청춘까지 부러워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겨우 35년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더욱 절실한 바람이었겠지요. 그리하여 영원히 사는 방법이 진지하게 모색되었습니다. 그리스 신들은 사실 당시 사람들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었는가'에 대한 꿈의 투영이었습니다. 신의 지위를 얻을 가망이 없자 그리스 철학자들은 불멸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을 찾았고, 나아가 삶의 의미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불멸하는 영혼'이라는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영혼은 인간의 의식, 곧 인격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의 이성, 옳고 그름을 가리는 감각, 활동의 원천이 바로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플라톤에 의해 한층 발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며 불멸적이고 비물질적인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혼은 신성한 속성을 지니며, 필멸의 것은 오직 육체뿐이라는 겁니다. 주로 플라톤이 만들어낸 이 이원론적 인간관은 수백 년간 힘을 발휘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종교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대 철학은 중세 유럽에 전해져 기독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은 불멸의 영혼과 필멸의 육체로 구성되며, 영혼은 육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어느 정도 불멸적이라고 합니다.

마시고 영원히 살아라!

그러나 내세에서 행복하게 존재하리라는 희망조차, 지상에서 누리는 영원한 청춘과 현세의 불멸에 대한 열망을 식히지는 못했습니다. 지붕 위의 하늘 비둘기보다 손안의 참새, 즉 지상의 불멸이 더 낫다는 속담처럼 말입니다. 하필 그 다른 세계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확신할 수 없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불멸의 영약(엘릭서)에 대한 처방은 고대부터 찾아졌고, 자신이 그 비법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효능은 후대에서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불멸의 엘릭서 레시피는 거의 모든 위도에서, 여러 시대를 걸쳐 끊임없이 탐색되었습니다. 그것은 노화를 막아 영원한 청춘과 무한한 생명을 보장하는 물질(아마도 액체)이어야 했습니다.

불로불사를 향한 인류의 탐구: 미라에서 냉동 보존까지

중세와 근대의 연금술사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지식과 업적에 기반해 회춘 이론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의 최대 목표는 현자의 돌을 찾는 것이었는데, 이 돌은 불멸의 선물 외에도 납과 철을 은과 금으로 바꾸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금속의 화학적 변환과 인체의 회춘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18세기에는 클로드루이 드 생제르맹이 그런 처방을 손에 넣었다고 알려졌지만, 기록에 따르면 결국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나는 질소 속에서 기다린다

불멸에 대한 희망은 의학의 발전과 함께 더욱 커져갔습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과학이 반드시 불멸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제임스 베퍼드(James Bedford)는 미래의 의사들을 기다리며 질소 속에 동결된 최초의 '크라이오넛(cryonaut)', 즉 냉동 보존자가 되었습니다. 그해는 1967년이었습니다.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이어졌고, 형편이 덜 한 사람들은 머리만이라도 얼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동 후 생명을 되찾은 사례는 율리우시 마훌스키 감독의 영화 섹스미션(Sexmission)의 주인공들, 루이 드 퓌네스 출연 영화 히베르나투스(Hibernatus)의 등장인물, 그리고 영화와 SF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대담한 도전자들뿐입니다.

불로불사를 향한 인류의 탐구: 미라에서 냉동 보존까지

1960년대, 냉동 보존을 감행한 최초의 도전자들이 등장했습니다.

현대 의학은 더 이상 불멸의 방법을 찾지 않습니다. 의사와 과학자들의 목표는 수명을 연장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습니다. 애초에 인간에게 불멸이 꼭 필요할까요? 그것은 분명 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연금 제도가 버티지 못할 것은 물론, 지구 전체가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요. 종교에 이성이 있다면 바로 이 경우일 것입니다. "현세에서는 경건하게 머무르고, 낙원은 내세에" — 우리는 단순히 이곳에 다 수용될 수 없으니까요.

참고 문헌

  1. Krzysztof Sobczak, On the understanding of death in Greek and Roman antiquity(그리스·로마 고대의 죽음 이해), "Humanistyka i Przyrodoznawstwo" 20호, 479~502쪽,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