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브라우닝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폴란드 사회당, 1월 봉기 이후 처음으로 차르 정권에 총구를 겨누다

코사크의 사벨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결의

폴란드 사회당(PPS)의 투사들은 코사크 기병이 폴란드인들의 시위와 집회를 사벨로 짓밟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손에 쥔 반짝이는 리볼버의 무게를 느끼며 차르의 병사들을 가차없이 쏘고 싶어 했다. 1904년 11월 13일, 그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새벽녘, 바르샤바 그지보프스키 광장(Plac Grzybowski)과 인근 거리의 주민들은 말발굽 소리와 군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200여 명에 달하는 경찰과 차르 정권의 기마·보행 헌병들이 광장을 행진하더니 작은 부대로 나뉘어 건물 문간에 숨어들었다.

무방비한 사람들을 더 이상 사벨로 베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바르샤바의 모든 사람은 폴란드 사회당이 오후 1시 그지보프스키 광장에서 열기로 한 일본과의 전쟁을 위한 폴란드 징집병 동원 반대 시위를 알고 있었다. 사회당은 노동자, 학생, 일반 대중을 향해 세 개의 호소문을 발표하며 시위 참여를 촉구했다.

브라우닝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폴란드 사회당, 1월 봉기 이후 처음으로 차르 정권에 총구를 겨누다

바르샤바 PPS 간부 회의를 이끌었던 유제프 크비아테크(Józef Kwiatek, 사진)는 PPS가 차르 병사들에게 무장 저항을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전날 바르샤바 노동자 위원회의 전단은 이렇게 예고했다.

우리의 시위는 우리를 짓누르는 정치 체제 전체에 대한 폴란드 민족의 깊은 증오를 웅장하게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로부터 두 주도 지나지 않아, 동원 반대 시위대가 바르샤바 레슈노(Leszno) 지구를 행진하던 중 비극이 벌어졌다. 코사크 한 개 중대와 수십 명의 보행 경찰이 무방비한 노동자들에게 사벨을 휘두른 것이다.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날카롭게 베었다. 거의 80명의 부상자가 보도 위에 쓰러졌고, 시위대 한 명은 코사크에게 팔이 잘려 나갔다.

이 비극 이후, 프라가의 한 지하 아파트에 모인 바르샤바 PPS 활동가 백 명의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유제프 크비아테크가 주재했으며, PPS는 더 이상 무기 없이는 시위하지 않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흥분한 사회주의자들은 발각될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청껏 외쳤다.

총을 구해라! 레슈노의 원수를 갚으리라!

브라우닝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폴란드 사회당, 1월 봉기 이후 처음으로 차르 정권에 총구를 겨누다

바르샤바 그지보프스키 광장은 폴란드 애국자들과 침략자 세력 간의 피바람 부는 충돌의 무대가 되었다.

발레리 스와베크와 서른네 자루의 리볼버

바르샤바 PPS의 특사 발레리 스와베크(Walery Sławek)는 600루블이라는 상당한 자금을 들고 키예프로 무기를 구하러 갔다. 실패했지만, 끝내 빈니차에서 불법으로 다량의 리볼버를 확보했고, 또 다른 음모가 자호르스키(Zahorski)는 폴타바에서 무기를 몇 자루 더 구입했다.

이틀 전, 스와베크는 리볼버 34자루와 브라우닝 권총 2정 — 음모가들이 애정 어린 별명 '브롱키(bronki)'라고 불렀던 무기들 — 을 실은 운송 수단과 함께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무기는 올해 초부터 거리 시위에 참여해 온 이른바 PPS 베테랑 투사들에게 배분되었고, 사립 기술학교의 학생들과 고학년 학생들도 무장했다.

이미 이번 봄, 유제프 크비아테크의 요청으로 바르샤바 공과대학의 한 학생이 폭발물 제조 실험을 시작해 가을까지 2kg을 생산해냈다. 그는 이 폭발물로 자신이 설계한 폭탄 두 개를 만들었다. 시위를 조직하던 크비아테크는 두 폭탄을 그지보프스키 광장에서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전날 PPS 투사 유제프 라트케와 브와디스와프 가브론스키에게 넘겨졌다.

브라우닝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폴란드 사회당, 1월 봉기 이후 처음으로 차르 정권에 총구를 겨누다

브라우닝 권총을 든 PPS 투사들.

조직진영은 시위 중 경찰과 싸울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PPS 내부에 숨어 있던 밀정 다비트 아이젠리스트(Dawid Ajzenlist)가 브라우닝 한 자루를 받았는데, 그는 오버폴리스 대령 카를 놀켄(Karl Nolken)에게 이 사실을 밀고했다. 그의 고발로 전날 보안 요원들은 유대인 투사 한 명을 체포했다.

"우리는 교회에 갈 뿐입니다"

오전 8시, 그지보프스키 광장은 노동자들과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수만 명의 인파가 교회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순찰 경찰들이 왜 여기 왔느냐고 물었지만, 모든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일요일 미사 때문이라고 답했다. 오늘처럼 붐비는 날에는 교회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게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브라우닝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폴란드 사회당, 1월 봉기 이후 처음으로 차르 정권에 총구를 겨누다

1904년 바르샤바 지도에 표시된 그지보프스키 광장.

11시경, 제8관구 경찰서장 보좌관이 교회 계단에 올라 군중을 향해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3개월 금고형 또는 3천 루벌의 벌금을 물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군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12시 30분, 경찰들은 그지보프스키 광장 일대에서 트램과 마차 운행을 멈춰 세웠다. 12시 15분, 미사를 마친 첫 신자들이 교회에서 걸어 나왔다. 인파 거의 모두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1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 계단 오른쪽에는 대부분 무장한 60여 명의 투사들이 모였다. 긴장감이 너무 고조되자 작전 지휘부는 결단을 내렸다.

예정보다 먼저 시작한다!

12시 20분, 스테판 오크셰이(Stefan Okrzeja)의 여동생이 블라우스 밑에서 작은 붉은 꾸러미를 꺼내 투사 '즈두(Zdun)'에게 건넸다. 시위 지도자 중 한 명인 네이만(Nejman)이 "깃발을 펼쳐라!"라고 외치자, 계단 위는 양귀비 씨를 뿌린 듯 고요해졌다. 스테판 오크셰이, 그의 여동생, 그리고 다른 투사들이 '즈두' 곁에 섰다.

모두가 '바르샤비앙카(Warszawianka)'를 노래했다. 첫 소절이 울려 퍼지자 광장을 메운 끝없는 군중이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오크셰이와 '즈두'의 머리 위로 다음 문구가 적힌 작은 붉은 깃발이 펼쳐졌다.

PPS — 전쟁과 차르주의 타도! 자유로운 폴란드 인민 만세!

총탄과 사벨 아래의 행진

깃발을 앞세운 행진 대열은 바그노(Bagno) 거리 방향으로 나아갔다. 1분 후, 아침부터 그곳에 매복해 있던 80명의 경찰이 바그노 거리와 그지보프스키 광장 모퉁이의 문간에서 쏟아져 나왔다. 서장 보좌관이 "사슈카(사벨)를 뽑아라!"라는 명령을 외치자, 그들의 손에 사벨이 번뜩였다.

브라우닝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폴란드 사회당, 1월 봉기 이후 처음으로 차르 정권에 총구를 겨누다

차르의 병사들은 성전(聖堂)조차 존중하지 않았다. 신자들이 모여 있던 교회 안으로까지 총격을 가했다.

첫 번째 경찰이 '즈두'에게 달려들어 깃대를 잡으려 했지만, '즈두'는 브라우닝을 뽑아 들고 덮친 경찰의 입에 총알을 박았다. 최초의 시신이 광장 보도 위에 쓰러졌다. 이윽고 오크셰이가 발포했고, 서른 자루가 넘는 리볼버의 포성이 울려 퍼졌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이미 미워하는 경찰들을 조준해 두었기에 경찰만을 겨냥해 쏘았다. 브로니스와프 주코프스키(Bronisław Żukowski)는 제8관구 서장 보좌관에게 세 발을 쐈지만 빗나갔다. 가브론스키는 폭탄을 던졌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경찰들은 뒷걸음질쳐 도망쳤고, 아수라장 속에서 투사들과 구경꾼 일부를 낚아채 연행했다.

깃발을 지켜라!

깃발 주위에는 십여 명의 투사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총격을 가하는 헌병들을 개의치 않고 바그노 거리를 따라 계속 전진했다. 거리 한가운데서 십여 명의 기마 헌병의 돌격을 조밀한 사격으로 막아냈고, 헌병 한 명은 살해된 말에 깔려 사망했다.

시비엥토크시스카(Świętokrzyska) 거리에서 깃발을 에워싼 무리는 용기병대를 분산시키려 했지만, 두 차례의 리볼버 일제 사격에 물러났다.

잠시 후, PPS 투사들은 깃발을 감추고 구경꾼 인파 속으로 흩어졌다.

한편, 지원 요청을 받은 군대가 광장을 포위했다. 겁에 질린 구경꾼들과 인파 속에 흩어진 투사들은 교회로 피신했다. 만원이 된 성전에서 늙은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경찰의 총알 몇 발이 교회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신자들은 벤치 뒤에 몸을 숨겼다. 사제는 강단에서 "주님께서 돌보시니…" 찬송가를 부르자고 청했지만, 군중의 공포에 찬 비명 소리 속에서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경찰과 군대가 그지보프스키 광장의 교회를 포위했다. 수백 명의 신자와 투사 무리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오버폴리스 대령의 명예로운 약속

바그노 거리에서는 담장 뒤에서 누군가 용기병 장교에게 돌을 던졌다. 보복으로 장교는 통행인 무리에게 발포를 명령했다. 세 차례의 일제 사격 후, 보도 위에는 여덟 명의 사망자와 십여 명의 부상자가 남았다.

브라우닝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폴란드 사회당, 1월 봉기 이후 처음으로 차르 정권에 총구를 겨누다

1904년 11월 13일의 사건을 기리는 추모석.

오후 3시 30분, 오버폴리스 대령 놀켄이 포위된 교회에 도착해 신자들에게 나오라고 권유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사람들은 경찰이 나오는 사람들을 구타한다고 답했다. 놀켄은 이제부터는 아무도 구타당하지 않으리라는 명예로운 약속을 했다.

200명의 사람들이 사제의 인도로 교회를 나섰다. 헌병들이 그들을 한쪽으로 데려가는 동안, 놀켄은 교회 문을 닫아 안에서 광장이 보이지 않게 했고, 경찰들은 여자, 노인, 아이들까지 포함해 모든 이들을 총개머리로 마구 구타했다. 그런 다음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구치소로 끌고 갔다.

헌병들이 교회에 갇힌 마지막 무리를 끌어낸 것은 밤 10시 30분이었다. 이날 체포된 사람은 모두 618명으로, 시청과 파비아크(Pawiak)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경찰들은 교회를 수색해 버려진 리볼버 열네 자루를 발견했다.

저녁까지 시내 거리는 격분한 군중들로 붐볐다. 바르샤바 주민 일부는 교회 모독과 민간인 희생을 규탄했지만, 다른 이들은 자부심에 넘쳐 이야기했다. 1월 봉기가 진압된 이후 처음으로, 폴란드인들이 차르의 고문관들에게 총구를 겨눴다는 것이다.

출처

이 글은 브와디미에시 칼리츠키(Włodzimierz Kalicki)의 저서 『역사 속 그날(It happened)』(Znak, 2014)에 수린 '오버폴리스 대령의 약속(The Word Oberpolicmajstra)' 장을 일부 축약한 판본입니다. 제목, 리드, 소제목은 편집진이 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