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봉기는 1944년 8월 1일 오후 5시에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봉기에 참여한 병사들 중 일부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포로로 잡힌 친위대(SS)와 게슈타포 요원들에게는 자비란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르샤바 봉기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여러 사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바르샤바 봉기, 알려지지 않은 10가지 진실
10. 포로가 된 게슈타포와 친위대 요원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봉기군에게 포로로 잡힌 게슈타포와 친위대(SS) 요원들은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포획된 직후 거의 즉시 총알을 맞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해를 끼친 독일계 주민, 이른바 폭스도이체(Volksdeutsche) 역시 같은 운명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국방군(베어마흐트) 출신 포로 병사들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고, 의료 지원을 받았으며,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식량 배급을 받았습니다.
9. 바르샤바가 싸우는 동안 크라쿠프 주민들은 나치를 위해 참호를 팠다
바르샤바 시민들이 독일군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는 동안, 크라쿠프의 주민들은 나치를 위해 참호를 파고 있었습니다. 국방군의 방어선이 될 교외 방어 공사에 엄청난 인파가 자원했습니다. 참여자가 너무 많아 독일군조차 놀랐고, 국내군(아르미야 크라요바) 내부에는 진정한 경악이 번졌습니다.
8. 만연한 굶주림 속에서 개와 고양이까지 냄비에 올랐다
봉기 기간 내내 곳곳에 만연했던 굶주림으로 인해 거의 모든 것이 식재료가 되었고, 개와 고양이도 봉기군의 냄비에 들어갔습니다. 국내군 사령관 보르-코모로프스키(Bór-Komorowski) 장군은 최전선에서 싸우던 부대를 방문했을 때 고양이 스튜를 대접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는 이 요리를 상당히 맛있게 먹은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작 본인은 끝내 고양이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7. 가장 비참한 희생자는 갓난아기들이었다
바르샤바 봉기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것은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음식이라도 먹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에 달하는 어린아이들이 굶주림과 독일군의 총탄, 그리고 무너진 건물 잔해 아래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6. '차타 49' 대대에 내려진 자살 임무
8월과 9월이 바뀌는 무렵, '차타 49(Czata 49)' 대대 병사들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반코비 광장(Plac Bankowy)에서 하수도를 통한 기습 상륙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고, 이는 독일군의 관심을 구시가지 철수 작전에서 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남긴 말은 어떠한 환상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구시가지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너희의 운명은 죽는 것이다."
5. 봉기의 시작을 결정한 것은 보르-코모로프스키가 아니었다
봉기 발발의 책임이 국내군 사령관 타데우시 보르-코모로프스키 장군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투 개시의 결정적 계기는 스타니스와프 미콜라이치크(Stanisław Mikołajczyk) 총리의 정치적 판단이었습니다. 그는 대규모 무장 봉기가 스탈린에게 효과적인 압력을 가하기 위한 협상 카드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4. 미국 공군의 단 한 번의 물자 투하
스탈린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인해 미국 공군은 싸우는 바르샤바를 위해 단 한 차례만 물자를 투하했습니다. 그마저도 9월 18일에야 이루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도시 상공에 투하된 1,284개의 보급 컨테이너 중 봉기군의 손에 실제로 들어간 것은 228개에 불과했습니다.
3. 봉기군의 주식, '침 뱉는 수프'
봉기군의 기본 식단 중 하나는 소위 '침 뱉는 수프'였습니다. 이 독특한 이름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물로 조리되어, 먹는 사람이 계속해서 왕겨를 뱉어야 했다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이 요리는 수많은 바르샤바 시민들의 회고록에 등장할 만큼 당시의 굶주림을 상징하는 음식이었습니다.
2. 많은 생명을 구한 하수도
하수도는 봉기 기간 동안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하수도를 통해 이동했던 전투 참가자들은 그 경험을 평생 가장 끔찍한 기억 중 하나로 꼽습니다. 하수도는 어둡고 더럽고 악취가 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눈을 피해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1. 봉기는 1944년 8월 1일 오후 5시에 시작되지 않았다
바르샤바 봉기가 1944년 8월 1일 오후 5시에 시작되었다는 통념은 사실과 다릅니다. 첫 전투는 훨씬 이전에 벌어졌습니다. 이미 오후 1시 50분, 즈지스와프 시에르핀스키(Zdzisław Sierpiński) '시비다(Świda)' 부대가 독일군과 소규모 교전을 벌였습니다. 오후 5시가 다가오면서 적과의 충돌이 급격히 늘어났고, 대부분의 교전은 오후 4시경에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