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주의와 일상의 고난, 논란과 영광의 순간, 위대한 성공과 실현되지 못한 계획들. 제2폴란드군단의 진짜 모습을 만나보자.
늘 그렇듯 이번 TOP10 순위의 모든 항목은 우리가 발행한 기사들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이번에는 앤더스 군대의 놀라운 운명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각 전선의 전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관련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앤더스 군대에 대해 알아두면 좋은 10가지
10. 베리아 덕분에 러시아를 떠날 수 있었다

라브렌티 베리아는 스탈린의 가족과 자주 시간을 보냈지만, 폴란드 문제에서는 제1서기의 뜻에 반하며 자신의 길을 밀고 나갔다. 사진은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를 무릎에 안고 있는 NKVD 수장의 모습이다.
1941년 가을, 붉은 군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베리아는 스탈린에게 폴란드군을 캅카스로 이동시켜 영국이 중동 지역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로비했다. 같은 해 9월, NKVD는 제1서기의 공식 허가가 없었음에도 소련 내 폴란드군이 우즈베키스탄과 볼가 방면으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했다.
9. 가난한 자들의 군대로 시작했다

1941년 겨울, 톳스코예에 있던 폴란드 병사 캠프의 스파르타적인 생활 환경.
폴란드군 지원자들의 모습은 가난과 절망 그 자체였다. 소련 영토에서 비인간적인 조건 속에 수개월간 강제 노동에 시달려 몸이 상하고, 영양실조에 옴까지 앓은 그들은 군대보다 병원에 더 적합해 보일 정도였다. 군 캠프의 환경 역시 형편없었다. 예를 들어 1941년 11월 초까지 약 60%의 병사들이 신발이 없어서, 병사들은 교대로 신발을 신어야 했다.
8. 때로는 폴란드인이 소수였다!

소련이 소련 내륙 깊숙이 추방한 폴란드 시민 중에는 유대인 7만 명,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 4만 5천 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다수는 훗날 앤더스 군대에 합류했다(소련 점령 희생자 관련 인포그래픽 일부).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 1941년 8월 12일자 소위 '사면령', 그리고 8월 14일자 군사 협정에는 어떠한 민족별 제한 조항도 없었다. 그 결과 제2차 폴란드 공화국에 거주하던 소수민족 출신들이 폴란드군에 대거 유입되었다. 폴란드 부대 창설 초기 며칠 동안 비(非)폴란드인이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7. 대규모 탈영을 묵인했다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뒤 정교회 신자 병사들의 탈영이 제2군단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지휘부는 이들을 추적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진은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리비우 어린이 제6장갑연대이다.
팔레스타인 체류 기간 폴란드군에서 유대인 병사들이 탈영한 규모는 상당했다. 무려 3천 명이 넘는 병사가 부대를 떠났다. 여러 정황상 유대인 출신 병사들의 탈영은 폴란드 지휘부의 인지와 묵인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교들 사이에서 탈영병에 대한 태도는 만장일치였다. 이들의 충성심이 이스라엘에 있다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러 가도록 내버려 두자는 것이었다.
6. 곰을 활용한 '작업'도 알았다

워테크가 가장 좋아한 놀이는 폴란드 병사들과의 레슬링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을 돕는 방식도 좀 특별했다…
유명한 곰 워테크의 애완(?) 기술은 물속으로 잠수해 목욕 중인 여성들 사이로 헤엄쳐 들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장난은 매번 비명과 발비짐을 불러일으켰다. 폴란드 병사들은 곰의 이런 버릇을 현지 여성들과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숙녀를 괴로움에서 영웅적으로 구해주는 것만큼 좋은 첫인사가 어디 있겠는가?
5. 훈련된 코만도 부대를 보유했다

1943년 스코틀랜드에서 훈련 중인 폴란드 코만도 부대.
폴란드 코만도 중대는 1942년 8월,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명령에 따라 서유럽에 거주하던 폴란드 병사들로 창설되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아크너커리에 있는 특수부대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3년 9월 알제리로 이동했고, 1944년 4월 앤더스 군대에 합류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4. 함께한 민간인들은 킬리만자로 근처에 정착했다

탱게루 폴란드 묘지 담벼락에 새겨진 명판.
소련에서 탈출한 폴란드인 중에는 민간인도 많았다. 영국은 이들을 제국의 여러 속주로 분산 배치했다. 약 2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아프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아프리카 최대의 폴란드 정착지는 메루산 기슭에 자리한 탱게루였는데, 산꼭대기는 구름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눈 덮인 유명한 킬리만자로 산이 선명하게 보였다고 한다.
3. 몬테카시노에서는 후송 릴레이를 운영했다

독일군이 적십자 표식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은 몬테카시노의 구호 작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몬테카시노에서 폴란드군 부상병들이 처음 응급 처치를 받던 지점과 후송 지점 사이의 고도 차는 400미터였고, 집중 포격을 받는 이동 경로의 길이는 2,200미터에 달했다. 이 구간의 부상병 후송을 위해 180개의 들것이 배정되었으며, 150미터 간격으로 벙커에 배치되었다. 부상병들은 한 거점에서 다음 거점으로 단계적으로 옮겨졌고, 부상병이 실린 들것만 빈 들것과 교체하는 방식이었다. 폴란드 병사들은 이 후송 체계를 '릴레이 경주'라고 불렀다.
2. 독일군에게 자신들의 4배 손실을 안겼다

제2장갑여단 병사들이 격렬한 전투의 틈을 이용해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1945년 4월 볼로냐 전투에서 성공적인 12일간의 전투를 치른 제2폴란드군단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234명이 전사하고 1,228명이 부상당했으며 7명이 실종되었다. 그러나 폴란드군은 이 작전에서 독일군에게 피로써 갚았다. 1,349명의 포로를 잡았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6,500명이 넘는 적군 병사를 전력에서 이탈시켰다.
1. 스탈린의 손아귀에서 폴란드를 해방시키고 싶어 했다

1946년 6월 2일, 이탈리아 카사라노의 폴란드 김나지움을 시찰하는 브와디스와프 앤더스 장군. 사실 그는 그때쯤 이미 폴란드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1945년 7월 1일, 연합군은 '언씽커블(Unthinkable)' 작전의 일환으로 폴란드를 공격해 소련 점령에서 해방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수천 명의 병사로 구성된 서방 폴란드군 부대는 브와디스와프 앤더스 장군의 지휘 아래 이 공세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점령자가 누구든 상관없이, 점령당한 조국 폴란드를 구하러 갈 만큼 결의가 굳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