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작전들은 전설이 되었고, 세계 각국 군대에 영감과 귀중한 경험을 남긴 교과서가 되었다. 폴란드 GROM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특공대는 정말 세계 최고일까? 1969년 그린 아일랜드 기습작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소모전의 그늘, 억지력이 필요했다
1969년 여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소모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시달렸고,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병력의 사기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이스라엘 지휘부는 강력한 억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작전을 추진했다. 동시에 기습적인 성공적 공격이 이집트로 하여금 휴전 협정을 준수하도록 압박하는 효과도 기대했다.
샤예렛 13(해군 특수부대) 사령관 제브 알모그는 수에즈 운하 입구 인근에 위치한 이집트 조기경보 레이더 기지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집트인들이 '자지라트 알-하드라'라고 불렀던 그린 아일랜드는 수에즈 운하 입구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건설했다.
해발 3m도 채 되지 않는 이 섬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콘크리트 벙커들의 집합체였다. 정보 당국에 따르면 섬에는 약 70명의 이집트 보병과 아스사이카 부대 소속 특공대원 12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중기관총 14정, 대공포 2문, 85mm 포 4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방비가 허술하지 않은 요충지였기에 임무는 해상 작전 경험이 가장 풍부한 사예렛 마트칼과 샤예렛 13에 맡겨졌다. 계획에 따르면 돌격 부대는 12척의 부선을 타고 이동했다. 처음 다섯 척에는 샤예렛 13 특공대원 20명이, 나머지에는 사예렛 마트칼 병력 20명이 탑승했다. 이들은 마지막 구간을 헤엄쳐 기습 상륙할 예정이었으며, 작전명은 '불무스 6(Bulmus 6)'이었다.
그린 아일랜드 강습
1969년 7월 19일, 특공대가 작전에 나섰다. 두 시간의 접근 행군 후 샤예렛 13 잠수요원들이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갔다. 이들은 '피그(Pig)'라 불리는 수중 운반체에 탑승했다. 산소통, 수류탄, 예비 탄약 등 무거운 장비를 짊어진 채로는 결코 해안까지 도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중 운반체는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 특수부대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수중에서 잠수요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이동 수단이다. 추가 장비 운반도 가능하게 해준다. 이 장비 덕분에 잠수요원이 활동할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이 크게 늘어난다." — 전 JW GROM 요원이자 페르시아만에서 활약한 폴란드 해상 특수요원들의 작전을 담은 책 『자토카(Zatoka)』의 저자 나발(Naval)

그러나 '피그'만으로는 부족했다. 장비가 너무 무거웠고 해류도 예상보다 강했다. 결국 특공대원들은 목표 지점에서 600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해야 했다. 예정보다 두 시간 이상 늦게 특공대는 이집트군의 철조망 앞에 도달했고, 장애물을 신속하게 제거했다. 섬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나발은 특공대가 비교적 수월하게 섬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날의 기술은 수중 그물과 기뢰를 훨씬 뛰어넘는다. 미확인 물체의 출현을 경고하는 각종 수중 센서와 레이더 같은 것들 말이다."
전투의 시작
마이클 바르조하르와 니심 미샬의 기록에 따르면, 상황은 이렇게 전개되었다.
"작은 다리 밑에 숨어 있던 병사들은 담뱃불을 든 초병 3명을 발견했다. (...) 정찰조 지휘관은 부대가 들킬 것을 우려해 초병들에게 기습 사격을 가하기로 결정했고, 이것이 작전의 첫 발사됐다.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이집트군의 초기 대응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섬 수비대는 완강한 방어 태세를 갖췄다. 길이 150m도 되지 않는 좁은 섬 위에서 유탄발사기와 중·경기관총이 오가며 격돌했고, 일부 벙커들은 연안 중포의 지원까지 요청했다.
두 번째 진영으로 투입될 예정이던 사예렛 마트칼 특공대원들은 공격 개시 신호를 기다렸다. 시간은 흘렀지만 신호는 오지 않았다. 그러다 밤하늘을 밝히는 조명탄이 섬 상공에 뜨고 전투 소리가 들려오자, 보트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15분 후 특공대는 수류탄으로 길을 열며 해안에 상륙해 주요 건물에 도달했다. 병사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옥상을, 다른 그룹은 벙커 내부 소탕을 맡았다.
"이런 시설을 수색하는 일은 지치는 작업이며, 어떤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모든 방을 서로 엄호하며 철저히 확인한다." — 페르시아만에서 밀수선을 수색했던 나발

몇 년 후 아미 아얄론 중위는 당시의 전투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최소한의 엄폐물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연막탄을 던졌다 (...) 그리고 함께 옥상으로 올라 적을 공격하던 잘리(잘만 로트)에게 외쳤다. 하지만 수류탄은 불발이었다. 우리를 향해 사격이 쏟아지던 진지에 공격용 수류탄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잘리가 왼쪽 기관총 진지에 수류탄을 던졌고, 나는 기관단총을 계속 사격하며 이집트 2번 진지에 도달했다. 10번 진지에서 사격이 쏟아졌는데, 나도 앞서 그곳에서 피격당한 바 있었다. 우리는 응사했고, 이집트군의 화약고가 폭발하며 진지는 불타올랐다."
철수와 승리의 대가
40분간의 전투 끝에 제브 알모그는 지휘부에 적이 약화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잠시 후 거대한 폭발음이 섬을 뒤흔들었고, 불꽃과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요새는 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몇 분 후 특공대는 철수를 시작했다. 이스라엘군은 병사 6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부상당했다. 이집트에게는 참담한 재앙이었다. 약 110명의 수비대원 중 생존자는 30명뿐이었다.

'불무스 6' 작전은 목적을 달성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 모두 이 섬의 파괴가 소모전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 7월의 밤 이후 이집트군은 서서히 작전 주도권을 잃어갔다.
당시 섬에서 직접 싸웠던 보병·낙하산병 군단 사령관 라파엘 에이탄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린 아일랜드 습격은 놀라운 성공으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작전 자체가 위대한 성과였으며, 우리의 안전을 강화하는 새로운 전투 방식의 길을 열었다. 이집트인들은 가장 악몽 속에서도 이토록 대담한 작전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이 작전에서 우리는 이후 오랫동안 기준점이 된 능력과 훈련 수준을 입증했다."
GROM에 남긴 유산
그린 아일랜드 작전이 세계 특수부대에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철저한情报 수집과 반복 훈련, 수중 운반체를 활용한 은밀한 접근,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유연한 대응. 폴란드 GROM을 비롯한 세계 정예 특수부대들은 이스라엘 특공대의 이러한 작전 방식을 연구하고 자신들의 교리에 흡수했다. 페르시아만에서 밀수선을 수색하고 해상 테러에 대비하는 GROM 해상 요원들의 전술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진정한 특수부대의 힘은 화력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와 대담한 실행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 작전은 오늘날까지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