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몰도바 원정의 시작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우키에프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는 터키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1620년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의 지휘를 맡게 됩니다. 몰도바 원정은 비극으로 끝났는데, 사실 이 패배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고사령관의 자비심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주우키에프스키는 술탄에게 예속된 속주들을 향한 코사크들의 끊임없는 침입을 막으려 애썼지만, 그들의 공격에 더해 지기스문트 3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원한 일, 그리고 빈을 포위한 베들렌 가보르(Bethlen Gabor)의 군대에 맞서 리소프치크(Lisowczyk) 부대를 파견한 일이 겹치면서 결국 터키와의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73세의 고령에 병약했던 대헤트만은 포르테의 공격에 앞서 몰도바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원정이 되리라는 것은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체초라 전투의 개막
1620년 9월 19일, 드니스터 강을 건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주우키에프스키와 코네츠폴스키(Koniecpolski)의 지휘 아래 체초라(Cecora)에서 이스칸데르 파샤(Iskander Pasha)의 부대와 교전을 벌였습니다. 전투는 폴란드군의 패배로 끝났고, 특히 마그나트(대귀족) 부대를 중심으로 전의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9월 20일 밤부터 21일로 넘어가는 시점, 전 몰도바 호스포다르(공후) 가스파르 그라찌니(Gaspar Grazziani)와 사무엘 코레츠키(Samuel Korecki)에게 선동된 병력들이 진영을 이탈해 프루트 강을 건너려 하자 헤트만들은 상황 통제에 실패했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최고사령관과 코레츠키 사이에 오간 대화는 거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반역자는 주우키에프스키가 소동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고 전해지며, 헤트만은 "내게서 흘러나온 것은 물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비트올트 피브니츠키(Witold Piwnicki)의 그림 중 체초라 전투를 묘사한 부분.
후퇴와 붕괴
노련한 지휘관은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차량 행렬 대형을 유지하며 연방 국경 방향으로 서서히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후퇴하는 동안에도 타타르 무리의 공격은 수시로 격퇴되었습니다. 그런데 드니스터 강까지 십여 킬로미터 남짓 거리가 남았을 때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첫 번째 반란 당시 짐수레를 약탈한 장난기 어린 하인들과 리소프치크 부대를 즉시 처벌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친 자들은 국경을 넘으면 죄인을 응징하겠다는 약속만 받았을 뿐입니다. 결국 10월 6일, 수송 부대 안에서 혼란이 터졌습니다. 종자들, 코사크들, 우편 부대원들이 "헤트만들이 도망친다"고 외치며 진영을 해체하고 강 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헤트만들은 탈주병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한 기록에 따르면, 패색이 짙어지자 코네츠폴스키가 주우키에프스키의 말고삐를 잡고 도망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했고, 끝까지 병사들 곁에 남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검으로 자신의 말을 베었다고 전합니다. 칸티미르(Kantimir) 지휘관들에게 포위된 그는 영웅처럼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스칸데르 파샤는 승리의 표시로 그의 잘린 머리를 술탄에게 보냈고, 지휘관의 시신은 종자들이 고향 주우키에프(Żółkiew)로 옮겨 안장했습니다. 한편 코네츠폴스키와 얀·우카슈 주우키에프스키 형제는 포로로 잡혔습니다.
누구의 책임인가
대헤트만은 마지막 원정에서 실수를 피하지 못했지만, 패배의 책임은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책임은 이 원정에 동행한 마그나트들이 져야 합니다. 그들은 주우키에프스키가 내린 명령을 자주 무시하는 등 진영 내 무질서와 혼란을 조장했습니다.
헤트만의 영웅적인 죽음은 조국을 지키다 생명을 바친 위대한 폴란드인들의 전당에 그의 이름을 올려주었습니다. 테오필 셈베르크(Teofil Szemberg) 등이 남긴 체초라 원정 기록은 그의 흠 없는 모습을 후세에 전합니다. 또한 스타니스와프 비트코프스키(Stanisław Witkowski)의 저작 「터키의 침략으로부터 기사 정신을 일깨우다」에서도, 반세기 가까이 공화국의 국경을 지켜온 헤트만을 잃은 슈라흐타(귀족) 형제들의 깊은 슬픔이 드러납니다.
"공화국의 노년에 전사의 죽음을 받들어
도망쳐 목숨을 구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폴란드의 명예를 위해 건강을 바치기를 택하여
모든 기독교를 위한 슬픔과 함께 그것을 바쳤노라—
그리고 폴란드는 피로 물든 헤트만을 애도하노니, 그럴 만한 인물이었음에."
주우키에프스키의 원수는 1621년 호틴(Hotyn) 평야에서 갚아졌으며, 그의 후견인이었던 스타니스와프 코네츠폴스키와 그의 친척 얀 소비에스키(Jan Sobieski)가 이끄는 터키·타타르와의 전투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
위대한 지휘관들의 성공 비결은 책 『폴란드의 전쟁의 신들』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위 글은 스타니스와프 주우키에프스키를 다룬 장의 발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