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전투는 태초부터 인간과 함께해 왔습니다. 원시 공동체는 사냥터, 여성, 가축 무리, 식량 저장고를 두고 다투었으며, 신들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물론 모든 갈등이 무력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며, 양보와 타협을 통해 풀어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감정이 이성을 앞지르고, 힘의 논리가 유일한 해답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고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고대는 웅장한 건축물, 풍부한 문학, 아름다운 조각상, 통찰력 있는 철학, 천재적인 발명품을 남겼지만, 동시에 새로운 전술과 새로운 무기를 탄생시키며 갈등의 규모를 한층 키웠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망자와 '발목까지 피에 젖은 전장'을 기록한 연대기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고대 최흉창한 전투 선정은 어느 정도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당시 기록 자체가 부족하고, 현존하는 사료들 사이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단 하나의 '최악의 학살'을 특정하기란 때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 순으로 정리한 고대의 대표적인 피의 전투 10선을 소개합니다.
1. 카데시 전투 (기원전 1280~1274년경)
고대 동방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로, 정확한 날짜는 오늘날까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파라오 람세스 2세 즉위 5년이라는 기록뿐이며, 그의 즉위 연도를 놓고 학계의 논쟁이 계속되면서 시간축 위의 위치를 정확히 정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당시 세계의 강대국, 즉 람세스 2세의 이집트와 무와탈리 2세가 다스리던 히타이트 제국이 카데시에서 충돌했습니다. 후대의 전쟁과 비교하면 규모 자체는 크지 않습니다. 젊은 파라오는 약 2만 명의 병력을, 히타이트 왕은 약 4만 명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역사상 가장 많은 전차가 한꺼번에 투입되었다는 점입니다.
이틀에 걸친 격전 동안 카데시 평원에는 거의 5,000대에 달하는 전차가 누볐고, 전투는 무승부로 끝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히타이트 측은 1만여 명의 전사자와 거의 모든 전차(약 3,000대)를 잃었으며, 이집트 측 기록에 따르면 파라오의 손실 또한 막대했다고 합니다.
2. 마라톤 전투 (기원전 490년 9월 12일)
제1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반란(이오니아 봉기, 기원전 499~494년)에 가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공격하면서 벌어졌습니다.
군사적으로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아티카 동부 해안의 평원에서 마주했습니다. 약 1만 1천 명의 중무장 아테네·플라타이아 호플리테스가, 배는 두 배 이상이지만 장비는 열세인 페르시아 대군과 맞섰습니다. 당시 일부 역사가들은 페르시아군을 무려 20만 명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군은 좌우 익단의 팔랑크스를 두텁게 보강한 뒤, 창과 방패로 이루어진 조여드는 포위망 안에 페르시아군을 가두었습니다. 도망칠 수 있는 페르시아 병사들은 해안과 함선을 향해 달렸지만, 많은 이들이 추격하는 호플리테스의 검에 쓰러지거나 근처 늪지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이 전투로 페르시아는 약 6,400명의 병사와 함선 7척을 잃었고, 그리스의 손실은 아테네인 192명, 플라타이아인 11명에 불과했습니다.
3. 플라타이아 전투 (기원전 479년 8월 27일)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결정적 국면 중 하나였습니다. 전년도 살라미스 해전에서 해상 패배를 당한 페르시아는 다시 아티카를 침공했습니다. 지휘관 마르도니오스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무려 30만 명의 군대를 거느렸다고 하나, 오늘날의 추산은 약 5~7만 명 수준입니다.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대부분 호플리테스로 구성된 약 4만 명이었습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에 가장 유명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들이 벌어졌습니다
야영지에서 3주간 대치한 끝에 페르시아군은 기병으로 공격했으나 처참히 격퇴되었고, 그리스군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습니다. 호플리테스의 전술과 중무장이 빛을 발하며 페르시아 진영은 눈에 띄게 무너져 내렸고, 마르도니오스 자신도 정예 부대의 필사적인 돌격 중에 전사했습니다. 이를 본 나머지 페르시아군은 전장을 이탈했습니다. 그리스는 약 1,500명의 전사자만 내고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왕중왕의 군대는 4만 명 이상이 쓰러지며 이 전투는 고대 최흉창한 전투 반열에 올랐습니다.
4. 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331년 10월 1일)
아케메네스 제국의 몰락을 확정지은 전투입니다. 그라니코스강과 이소스에서의 패배로 나라와 명예를 되찾아야 했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전차 200대와 전투 코끼리 15마리를 포함해 거의 24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경사진 대형(사선 진형) 전략과 전술 앞에서, 병력 열세(약 5만 명)를 극복한 마케도니아군의 기교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고대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치열한 전투 도중 다리우스 3세는 결국 심리적으로 무너져 전장을 이탈했습니다. 이것이 페르시아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었고, 4~9만 명의 병력을 잃은 페르시아군은 와해되었습니다. 사료들은 마케도니아군의 전사자를 약 1,000명으로 기록합니다. 이 수치가 과장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알렉산드로스의 손실이 다리우스에 비해 몇 배나 적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5. 칼링가 전투 (기원전 261년경 추정)
인도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고 중요한 전투 중 하나입니다.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 아소카와 칼링가의 지방 통치자(아소카 국가 발전에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땅) 사이에 벌어진 소위 '칼링가 전쟁'의 일부였습니다.
각종 사료를 종합하면 전투 참여자 수는 약 35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전투의 구체적인 경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소카 측은 5~7만 명, 칼링가군은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전설에 따르면, 참전 용사들이 남긴 처참한 희생을 목격한 황제는 더 이상의 정복을 접고 불교로 귀의했다고 합니다.
6. 장평 전투 (기원전 260년 4월~7월)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결정적 전투였습니다. 이 시기의 전쟁은 극도로 잔혹했는데, 각국이 백만 명이 넘는 군대를 운용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평에서 벌어진 일은 그 이전이든 이후든 어떤 전투보다도 처참했습니다. 40만이 넘는 조나 병사를 지휘하던 조괄은 병력을 나누어 일부에게 적진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그의 상대인 진나라의 백기 장군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0만이 넘는 진나라 대군을 거느린 백기는 의도적인 후퇴 기동을 명령했습니다. 조괄의 공격 부대는 함정임을 제때 알아챘지만, 이미 후방은 백기의 기병 3만 대군에게 돌파된 상태였습니다. 조괄은 급히 진지를 구축해 필사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고, 구원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초기 진지에 남아 있던 부대들도 같은 처지에 놓였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46일간 이어졌습니다.
조괄은 최후의 포위 돌파 시도 중 전사했고, 그의 죽음 이후 남은 군대는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이제부터였습니다. 승자 백기는 가장 어린 병사 240명을 제외한 모든 생존자의 처형을 명령했습니다. 이들은 공포에 질려 고향으로 돌아가 무시무시한 진나라 군대의 소문을 퍼뜨리게 되었는데, 정작 진나라 역시 25만 명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7. 칸나이 전투 (기원전 216년 8월 2일)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거둔 최대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승슬장구하던 한니발의 군대가 로마군을 쉽게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징조도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풀리아 평원에 승리를 확신하는 병사 약 8만 8천 명을 집결시켰고, 두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공동 지휘했습니다.

칸나이 전투는 실질적인 대학살이었습니다
한니발의 병력은 절반 수준이었지만 결의는 뒤지지 않았습니다. 로마군이 정면 공격으로 카르타고군 중앙을 밀어붙이면서 자신들의 대열은 위험할 정도로 길게 늘어나 활 모양을 그렸습니다. 바로 그때, 로마 기병을 측면에서 격파한 한니발의 기병대가 후방에서 군단병들을 강타했습니다. 순식간에 전장의 주인이었던 로마군은 포위된 채 필사적인 방어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그 용맹함도 소용없었고, 좁혀지는 병력과 말의 파도 앞에 차례차례 쓰러져갔습니다. 전투 전 한니발이 포로 생포를 금지했다는 사실이 공포를 더했습니다. 한니발의 손실은 약 7,000명에 불과한 반면, 무려 6만 명의 군단병이 쓰러진 진정한 대학살이었습니다.
8. 알레시아 전투 (기원전 52년 9월 혹은 10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을 마무리한 결정적 전투였습니다. 약 5만 명의 카이사르 군대는 갈리아의 마지막 요새 알레시아를 이중 포위망으로 에워쌌습니다. 내곽은 성 안의 9만 명에 대한 방어용, 외곽은 곧 도착할 최대 25만 명의 갈리아 구원군 저지용이었습니다. 이처럼 극심한 병력 열세는 군단병의 훈련과 장비, 그리고 다수의 탑, 말뚝 울타리, 뾰족한 말뚝과 물웅덩이를 갖춘 정교한 방어 시설로 만회되었습니다.

전장 인근에 세워진 베르킨게토릭스 기념비
갈리아군이 로마 진지를 며칠간 공격한 끝에, 마침내 성 안에서 6만 명의 생존 병력이 합류한 동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갈리아군은 카이사르의 방어선 깊숙이 침투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유일하고 마지막 성과였습니다. 군단병들은 공격을 격퇴하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고, 용감하지만 규율 없는 갈리아 부대는 이를 버티지 못했습니다. 4만~25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갈리아군은 와해되었고,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는 포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로마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손실은 약 1만 3천 명이었습니다.
9.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기원후 9년 9월)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부족 연합과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의 로마 군단 사이에 벌어진 3일간의 전투였습니다. 새로 설립된 게르마니아 속주에서의 무능하고 약탈적인 로마 통치는 현지 민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게르만족 지도자 아르미니우스의 능숙한 지휘 아래, 그들은 3개 군단(병사 및 보조 부대 약 3만 명)을 엠스강과 베저강 사이의 숲 지대로 유인했습니다. 정면 전투를 회피하며 도망치는 게르만족을 추격하느라 로마군의 종대는 15km에 달할 정도로 길게 늘어졌습니다.
바루스는 행군 시 정찰 부대를 배치하는 등의 기본적인 예방 조치를 버렸고, 이것이 아르미니우스 전사들의 기습을 더욱 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병력은 최대 4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군단병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활지로 빠져나가 적의 수적 우위를 훈련과 장비로 상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불리한 지형에서 벌어진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3개 군단은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숲의 덫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바루스는 장교들과 함께 자결했습니다. 게르만족의 손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0. 아드리아노플 전투 (기원후 324년 7월 3일)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리키니우스 황제 사이의 테트라르키아(사두정치) 내전의 결정적 전투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싼 외교적 분쟁이 미해결 상태로 끝나면서, 고대 최대급 전투 중 하나로 폭발했습니다. 아드리아노플 근교에는 양 진영 합쳐 약 30만 명의 병사가 대치했습니다. 리키니우스 측이 병력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적을 기습하여 측면을 돌파하고 적을 패주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리키니우스는 약 3만 4천 명의 병사를 잃으며 제위 경쟁에서 패배했고, 콘스탄티누스 측의 정확한 손실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