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입니다.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파리스에게 납치된 미녀 헬레나의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한 여인의 납치로 촉발된 분쟁 속에서 영웅들은 10년 동안 신들과 함께 싸우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는 얼마나 많은 진실이 담겨 있을까요? 트로이 전쟁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일까요? 그리고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호메로스 작품이라기엔 애매한 서사시
트로이 전쟁 신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서사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입니다. 『일리아스』는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갈등,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그리고 헥토르에 대한 복수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디세이아』에서는 병사들이 숨어든 목마가 도시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장면 등 트로이의 멸망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7세기경 소아시아 서부 스미르나(오늘날 튀르키예 이즈미르)에 살았던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일까요?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두 서사시 사이에는 언어적 차이가 존재하며, 이는 두 작품이 같은 저자의 것일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더욱이 이 이야기들은 그 이전부터 노래나 설화의 형태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나의 통합된 이야기로 정리된 것은 호메로스의 시대 혹은 그 이후였을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에서 파생된 비교적 새로운 문자 체계였고, 지식과 이야기는 주로 구전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기억하기 쉽고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 이야기에는 적절한 운율을 지닌 노래의 형식이 부여되었습니다.

오늘날 알려진 서사시 내용과 일치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대략 기원전 3~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앞서 이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아티카의 비극 작가들이 이 신화를 작품에 활용했습니다. 이 유명한 전쟁의 장면들은 기원전 6~5세기부터 이미 화가와 조각가들에 의해서도 예술 작품으로 남겨졌습니다.
신화와 현실 사이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트로이 전쟁 신화를 극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 믿었습니다. 물론 투키디데스처럼 호메로스가 상상력을 과장했다며 그의 서사시를 단순한 신화로 취급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이야기를 한층 더 발전시켜 자신들의 국가 서사시로 삼았습니다. 『아이네이스』는 불타는 트로이에서 탈출해 위대한 로마 건국의 초석이 된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리온이라고도 불린 트로이는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방문한 곳이었습니다. 소아시아를 여행하던 황제들은 모두 이 도시에 들러 제물을 바쳤습니다. 카라칼라 황제는 이 이야기를 살려두는 데 남다른 집착을 보여 일리온에서 유명한 전쟁의 한 장면을 직접 재현하기까지 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추모하기 위해 열었던 경기를 재연하는 과정에서는 자신이 총애하던 페스투스를 독살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트로이의 위치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후기 로마 시대에는 이미 이 유명한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6세기의 지진도 도시 유적의 훼손에 한몫했습니다. 중세에는 도시 자체와 그 위치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트로이 전쟁 신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활용되다가, 1488년 『일리아스』가 처음 출판되면서 고전 문학의 정전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신화는 점점 커져갔고, 그것이 실제 역사와 어떤 관련이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독일 상인이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 나서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꿈을 이룬 부유한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1822년 독일 메클렌부르크의 노이부코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결코 모범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알코올 의존 성향 탓에 집안에는 늘 돈이 부족했고, 하인리히는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7년 뒤에는 아버지 에른스트 슐리만이 하녀와의 스캔들로 인해 교회 직무에서 파면되고 만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하인리히는 삼촌의 보호 아래 김나지움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상점 점원으로 일하며 여가 시간에 외국어를 독학했습니다. 특히 러시아어 실력은 그의 이후 경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슐리만은 이 재산을 바탕으로 평생의 꿈, 즉 신화 속 트로이의 성벽을 발굴한다는 꿈을 실현하게 됩니다.

'프리아모스의 보물'과 신화 속 도시의 발견
슐리만은 호메로스 서사시의 묘사를 따라 트로이 유적을 찾아 나섰고,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히사를릭 언덕에서 그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1870년 이곳에서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고, 연구는 빠르게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발굴 조사 중에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명명한 유물군이 발견되었습니다. 보물은 터키 감독 당국의 입회 없이 신속하게 채굴되었는데, 이는 원래 그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의무였습니다. 일꾼들의 탐욕이 우려되어 작업 인원을 해고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슐리만은 원래 석제 상자에 보관되어 있던 8,833점의 유물을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아내와 함께 이 보물을 발굴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선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내가 자신의 발굴 작업에 관심을 갖도록 설득하기 위해 만든 연출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트로이 II층에서 '프리아모스의 보물'이 발견되자 슐리만은 자신이 신화 속 도시에 도달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연구를 중단하고 또 다른 전설을 좇아 다른 유적으로 옮겨갑니다. 불법 보물 반출 소송을 이유로 터키 당국이 추가 발굴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도 이 결정에 한몫했습니다.
트로이로의 귀환
슐리만은 1882년 젊은 고고학자이자 건축가인 빌헬름 되르펠트와 공동 작업을 시작하며 트로이 연구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그 자신도 발견한 트로이가 찾고자 했던 바로 그 도시라는 확신을 온전히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되르펠트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출토 토기와 유사한 조각들을 포함한 지층을 집중적으로 탐색했습니다. 슐리만 사후 진행된 그의 연구는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트로이 II층보다 후기 지층, 즉 트로이 VI와 VII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결국 '프리아모스의 보물'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묘사된 사건들보다 약 1천 년이나 앞선 시대의 지층에서 나온 것이었던 셈입니다.
전설의 나무말, 그 정체는?
병사들로 가득 찬 나무말이 도시 안으로 끌려 들어간 사건은 트로이 전쟁 이야기 전체의 핵심입니다. 공략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도시가 함락된 것은 바로 이 목마 덕분이었죠. 하지만 과연 그것은 나무로 만든 말이었을까요?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이 이야기에 숨겨진 의미를 밝히려 노력해왔습니다. 호메로스 자신이 배를 아카이아인들에게는 말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 구절에 근거한 한 가설은, 도시의 멸망을 이끈 것은 말이 아니라 배였다고 주장합니다.
로마 문학에서는 대플리니우스나 파우사니아스 같은 저자들의 글에서 트로이 목마가 무려 공성 기계, 즉 성문을 부수기 위한 충성 포였다는 견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트로이 목마 개념이 단순히 기지와 속임수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고대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반전 있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으니까요.
참고 문헌
- N. Fields, "Troy c. 1700-1250 BC", Oxford 2004.
- M. Korfmann, "Was there a Trojan War?", Archeology, vol. 57, No. 3, May/June 2004.
- "Troy. Henryk Schliemann's dream. Catalog of the exhibition from the collection of the Museum für Vor- und Frühgeschichte in Berlin", State Archaeological Museum, Warsaw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