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히틀러의 가장 큰 적은 스탈린이 아니라 히틀러 자신이었다

80년 전 소련 침공을 감행한 히틀러는 나폴레옹이 이루지 못한 정복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이루지 못했다. 그의 군대는 붉은 군대에게 패배한 것일까? 아니면 총통 본인의 실수 때문이었을까?

"역사상 가장 악질의 범죄자이자 괴물이었던 그는 임상적으로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1941년에 저지른 미친 듯한 실수들의 목록은 여전히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고 마르크 솔로닌은 저서 『소련은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했는가』에서 쓰고 있다.

히틀러의 가장 큰 적은 스탈린이 아니라 히틀러 자신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가장 큰 적은 과연 그 자신이었을까?

실제로 1941년 초는 히틀러가 거의 유럽 전역의 주인이자 통치자로서 맞이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정복하지 못한 국가는 동맹국이거나 중립국이었다. 소련으로부터는 물자가 강물처럼 흘러들어왔다. 영국은 자국 섬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고립되어 있었고 경제 붕괴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그런데 단 12개월 후, 제3제국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소련과 동시에 맞서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히틀러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다.

망설임

6월 22일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했을 때 그들은 저항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공격은 북부, 남부, 모스크바의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특히 중앙 집단군이 가장 중요해 보였다. 모스크바 함락은 전쟁의 귀추를 결정지을 수 있었다.

"전투 개시 한 달 만에 수도, 즉 국가의 상징이자 권력의 중심을 잃는 일은 군과 국민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솔로닌은 쓰며, 대중 여론 조작의 전문가였던 히틀러야말로 이를 잘 알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스몰렌스크 함락 후 히틀러는 기괴하게 행동하기 시작했고 모스크바 공격을 늦추었다. 왜일까?

바르바로사 작전은 발칸 반도 전투에 독일이 개입하면서 몇 주 늦게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매주의 지연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 즉 동부의 겨울은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을 미루었다. 아마도 그는 130년 전 나폴레옹의 군대에는 없던 기동력을 자신의 국방군이 갖추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히틀러의 가장 큰 적은 스탈린이 아니라 히틀러 자신이었다

공세 초기의 빠른 성공은 스탈린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1941년 여름 모스크바를 점령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기회를 낭비했다. 또 다른 역사학자 앤드류 나고르스키는 히틀러가 무의식적으로 나폴레옹의 운명을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시사한다. 모스크바를 점령해도 얻는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제34호 지침을 통해 부대들에게 소련 수도 진격 계획을 연기하라고 명령했다.

모스크바 입성을 눈앞에 둔 폰 보크와 구데리안은 새 지침에 분노했다.

모스크바 방면의 공세는 초가을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진창이 된 도로에서 차량 행군은 극도로 어려웠다. "2개월 반이 헛되이 낭비된 것"이라고 솔로닌은 요약한다.

경시

『소련은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했는가』의 저자는 이 파국적인 오류가 또 다른 실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독일은 막대한 병력으로 스탈린의 국가를 공격했지만 예비 병력은 매우 빈약하게 편성했다. 독일 본토에서 새로운 장비는 거의 전선에 보내지지 않았다.

첫 2개월간 전선에 보내진 전차는 89대뿐이었고 그 절반은 경전차였다. 1941년 말까지 동부 전선에 보내진 전차와 돌격포는 솔로닌의 말대로 "513대"에 불과했다. 저자는 "1천5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선에서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되묻는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보급의 부족은 독일 군수 산업의 생산 능력과 맞지 않았다. 1941년 독일은 월평균 약 250대의 전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동부의 국방군이 길게 늘어진 전선과 씨름하는 동안 "45개 보병 사단과 2개 기갑 사단이 프랑스와 발칸에서 놀고 있었다"고 솔로닌은 지적한다. 게다가 1941년 봄, 소련 침공 직전에는 무려 50만 명의 병사가 제대되었다.

'점토 거인'이라 불린 소련을 제압하는 데 걸릴 시간에 대한 추정은 다양했다. 극단적인 낙관론자들은 2주를 내세웠고, 히틀러는 좀 더 신중하게 3~4개월이면 스탈린을 격파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승리에 대한 확신은 변함이 없었다. 공격 이틀 전 그는 장군들에게 "문을 걷어차기만 하면 저 썩은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호전적인 선언의 핵심에는 적의 전력에 대한 경시가 자리하고 있다. 무력 충돌의 태초부터 지휘관들이 범해 온 최대의 실수 중 하나이다.

인종주의

또 하나의 실수는 히틀러와 그의 국가의 불변의 특징인 타 인종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었다. 나치 지도자는 슬라브족과 동유럽의 다른 민족들을 경멸했다. 유대인은 대량으로, 계획적으로 살해되었다. 홀로코스트는 6월 22일 공격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제3제국은 다른 민족들을 포섭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의 많은 시민들, 특히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주민들은 공산주의 통치를 너무나 증오하여 독일의 확장을 지원할 수도 있었다. 1941년 여름이 끝날 무렵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 병사는 150만 명에 달했고, 그 숫자는 이후 배로 늘었다. "이것은 거대한 징병 대상이었고, 지휘 체계를 갖춘, 각종 군사 전문가들의 집단이었다"고 솔로닌은 쓴다.

여기에 점령지에 남겨진 장비도 있었다. 독일 장군들은 이 기회를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솔로닌에 따르면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침공을 해방 전쟁으로 포장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역사학자 앤드류 로버츠는 이 정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리아 지배 인종이라는 나치 철학의 본질적 부분은 독일인이 어떤 면에서든 슬라브족을 지배한다는 것이었고, 전차의 수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가장 큰 적은 스탈린이 아니라 히틀러 자신이었다

사진: NAC / 퍼블릭 도메인. 독일군이 어마어마한 거리를 진군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독일군이 엄청난 거리를 진군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부분적인 진실이다. 마르크 솔로닌은 북아프리카의 연합군이 사막을 가로질러 마찬가지로 광활하고 적대적인 지역을 극복한 사례를 들며, 문제가 킬로미터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현지 주민에 대한 독일의 만행은 그 규모가 너무 커서 곧 점령지 주민들은 침략자에게 등을 돌렸다. 저항은 강화되었고 소련 빨치산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포로에 대한 독일군의 처우에 관한 소식이 퍼지면서 붉은 군대 병사들은 점점 더 항복하기보다 끝까지 싸우는 쪽을 선택했다"고 앤드류 나고르스키는 쓴다.

히틀러의 증오는 국방군이 현지의 지원을 받을 기회를 빼앗았고, 독일 공장들은 값싼 노동력을 잃었다. 한편 독일은 병사가 절실했다. 초기 몇 달 동안 성공에도 불구하고 약 20만 명을 잃었다. 앤터니 비버는 저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는 소련의 손실의 10분의 1에 불과했지만, 소모전이 계속되면서 국방군은 늘어난 보급선을 방어하고 남은 소련군을 격파하는 데 고전했다.

국방군 병사들 입장에서 현지 주민의 협조를 기대할 수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3제국의 지도자 본인이 그런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렸다.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에서 첫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자신의 패배를 프로그램해 놓았다. 만약 그렇게 많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승리의 가능성은 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는 과연 '같은 히틀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