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앙골라는 폴란드의 식민지였을까? 적도의 엘도라도를 꿈꾼 폴란드인들

얼마 전 필자는 해양식민지협회(LMiK)가 라이베리아와의 무역 관계 수립을 추진했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는 '흑인 대륙'을 향한 폴란드인들 자신만의 식민지 야심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또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주고자 한다. 오늘 우리는 이들과 함께 '정복'의 대상이 된 앙골라로 떠난다.

앙골라, 폴란드 식민 확장의 최적 후보지?

전간기(양차 대전 사이 시기) 당시 앙골라는 포르투갈 최대의 식민지였다. 서류상 120만 제곱킬로미터라는 면적은 인상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인구 밀도가 극히 낮았다. 1930년대 말 기준 인구는 약 250만 명에 불과했으며, 압도적 다수가 원주민이었다. 이 지역에는 금속 광석(귀금속 포함), 다이아몬드, 원유, 천연가스 등 풍부한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적도성 기후 덕분에 커피, 면화, 고무 재배 역시 잘 발달해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 덕분에 1927년, 앙골라는 해양식민지협회의 전신인 해강협회의 주시 대상이 되었다. 1928년 4월 22일에는 식민지 개척자 협회(협회 산하 조직 중 하나) 회장 카지미에시 구호프스키가 리스본으로 향했다.

여행의 목적은, 협회 기관지 월간지 '모레(바다)'의 보도에 따르면 "포르투갈 정부 또는 앙골라 철도 회사와의 협상을 통해, 폴란드의 식민 확장에 적합한 앙골라 내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5월 15일 폴란드로 돌아온 그의 성과에 대해 6월 호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본국 수도에서 이 안건을 심층 검토한 결과, 협회는 앙골라가 농업 식민화와 폴란드인 정착에 적합한 땅이라는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리스본에서 구호프스키 씨는 앙골라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현지 인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이들은 폴란드의 활동을 위해 폭넓은 편의를 제공할 용의를 밝혔다.

따라서 향후 활동은 한층 활발해져, 사업의 실질적 실행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실제로 모든 것이 '활발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앙골라를 이주하기 좋은 곳으로 홍보하는 기사가 협회지와 일간지를 가리지 않고 속속 실렸고, 이 지역의 지리적 조건과 경제 활동 현실을 다룬 소책자도 여러 권 출간되었다. 물론 그 내용은 폴란드의 '경제적 확장' 가능성을 극도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28년 12월 14일, 과학식민이주연구소와 폴란드 열대연구소가 이 포르투갈 식민지로 특별 탐사대를 파견했다. 프란치셰크 웁이 이끈 탐사대의 임무는 폴란드인 정착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현지에서 직접 검증하는 것이었다.

정찰 결과는 유망했다. 앙골라는 예컨대 브라질과 달리 '튼튼한 팔'보다는 자본이 요구되는 곳이었는데, 현지에는 값싼 노동력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다만 성공하려면 상당한 투자가 필요했다. 타데우시 비아와스의 저서 『해양식민지협회 1930~1939』에 따르면, 웁은 정착민이 최소 만 즈워티(오늘날 가치로 약 89,000 즈워티 상당)를 갖춰야 한다고 추산했다. 농장 구입과 장비 마련에 8천 즈워티가 소요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2천 즈워티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결국 앙골라는 편리한 정착지로 평가받았지만, 오직 부유한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폴란드인들의 앙골라 정착이 시작되다

낙관적인 전망에 힘입어 1929년은 첫 폴란드 정착민 파견 준비의 해가 되었다. 이를 위해 포르투갈 및 그 식민지와의 통상·경제 관계를 담당할 회사 '폴랑골라(Polangola)'의 특별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협동조합 '알파'와, 이름 그대로 앙골라 식민화를 임무로 삼는 '앙골라 식민화 협회'도 설립되었다. 심지어 같은 해 가을 체결된 폴란드-포르투갈 통상조약에는, 폴란드 시민이 사회복지와 노동 보호 면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보장하는 기밀 정착 조항까지 삽입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식민화를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개척의 선봉은 미하우 자모이스키 백작에게 맡겨졌다. 그는 1929년 12월 7일 아내와 함께 리스본으로 향했고, 12월 20일에는 배를 타고 플랜테이션을 일으키기 위해 앙골라로 출발했다. 동시에 그는 '폴랑골라' 회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6개월 뒤에는 두 번째 정착 단체가 길에 올랐다. 엔지니어 아담 파슈코비치가 이끈 식민지 개척자 협회 회원 6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축산업과 공업 활동에 종사할 계획이었으며, 1932년 9월에는 농학자 예지 흐미엘로프스키가 이들과 합류했다.

'뒤처진 아프리카를 개척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앙골라의 도로는 오히려 폴란드보다 나았다! 율리우시 게베트네르는 1938년 앙골라 통신에서 이렇게 적었다. "로비투에서 차를 타고 폴란드 정착민들의 중심지인 포스투 키페이오로 떠났는데, 무엇보다 도로 포장이 완벽하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 도로를 달렸던 기억과 무관하게, 비교는 분명히 아프리카 쪽으로 기울었다."('모레', 1938년 4월)

한편 언론에서 앙골라 이민 붐을 부추긴 것은 물론 사기꾼들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아프리카에서 번영을 누리겠다는 헛된 약속으로 순진한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1931년 4월에는 '모레' 지면에 이러한 행태에 대한 경고 기사까지 실렸다. 편집부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방에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수많은 농민, 심지어 상당한 규모의 지주마저 수수께끼의 중개인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들은 상당한 현금을 받아 쥔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 건의 사기 피해액이 수천, 심지어 수만 즈워티에 이르기도 했다.

게다가 바르샤바 언론에는 알 수 없는 후원자에게 문의하라는 수수께끼의 광고가 게재되었는데, 이들은 심지어 앙골라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까지 발행할 작정이라고 했다.

폴란드에게 주어지지 않은 앙골라

폴란드 언론에서 벌어진 앙골라에 대한 '미디어 붐'에 가장 큰 이해당사자인 리스본 당국도 곧바로 반응했다. 외무장관 요제프 베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우리의 정책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고, 영국에서는 가장 유력한 인사들이 폴란드의 위험한 야심에 대해 심한 반감을 드러냈다."

포르투갈은 새로운 외국인들의 식민지 유입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정착 대상 지역에 일련의 장벽을 도입했다. 물론 이는 폴란드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언급한 기밀 정착 조항을 폴란드 측에 포기하도록 강요한 일이다.

그리하여 몇 년간 앙골라 문제는 잠잠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적도의 엘도라도를 향한 꿈의 완전한 종말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착각이었다. 이 주제는 1930년대 말 다시 불붙었다. 이번에는 협회가 아니라 폴란드 외무부가 '경제적·인적 확장'을 앙골라로 파견할 방안을 검토하며 움직임의 주역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T. 비아와스의 저서에서는 앙골라에서 최대 2만 헥타르의 토지를 구매해 식민화·플랜테이션 사업을 벌이려던 계획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포르투갈 정부의 반감을 감안해, 명목회사를 통해 13,100프랑에 토지를 매입하는 방식이 검토되었다. 또한 행정상 앙골라 관할 지역에서 활동하던 '카빈다(Cabinda)' 회사의 지분 과반을 180만 즈워티에 사들이는 방안도 거론되었다. 그러나 결국 두 아이디어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앙골라 '사건' 전체를 가장 잘 요약하는 것은 1938년 4월호 '모레'에 실린 율리우시 게베트네르의 기사일 것이다. 그가 집계한 이 나라의 폴란드인 플랜테이션은 고작 다섯 곳뿐이었다. 1938년, 앙골라에는 단 5개의 폴란드 정착지만 남아 있었다. 우리의 적도 엘도라도라는 꿈은 이렇게 끝을 맺은 것이다.

마치 위로라도 하는 듯 그는 "우리는 곧 폴란드 정착민들이 재배한 우리 고유의 커피를 폴란드에서 마시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1년 반 뒤 전쟁이 발발했고, 우리는 앙골라산 폴란드 원두의 맛을 볼 기회를 영원히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