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 늑대가 있다고? 물론 그렇다. 그것이 없었다면 전쟁과 전투의 역사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인류는 모든 것을 두고 싸워왔고, 그 구실은 하찮았지만 결과는 때로 처참했다. 그리고 가끔은 상대편이 더 영리했는데, 그 상대가 인간이 아니었던 경우도 있었다.
동물이 인간 삶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동물은 전쟁의 역사에서도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신화적인 트로이 목마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돼지가 촉발한 '돼지 전쟁'
돼지 역시 전쟁의 역사에 한 획을 그렸다. 그중 하나는 1859년 미국과 영국 간의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오늘날 캐나다와 미국 국경에 위치한 산후안 섬을 둘러싼 오해였다.
1846년 체결된 오리건 조약은 이 섬의 귀속 문제를 애매하게 남겨 두었고, 곧이어 미국 정착민들과 영국 허드슨베이 회사의 상인들이 동시에 섬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형성된 이해관계의 충돌은 미영 관계에 오래 잠복해 있던 긴장을 폭발 직전까지 끌어올렸다. 무심한 돼지 한 마리가 양국을 또 다른 전쟁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바로 허드슨베이 회사의 재산인 돼지였다. 이 동물은 미국 농부의 밭을 망쳤고, 참지 못한 농부는 현장에서 돼지를 사살해 버렸다. 회사는 이 사건을 영국 당국에 보고했고, 농부는 체포 위협을 받았다. 이에 미국 정착민들은 자국군의 지원을 요청했고, 영국은 함대 하나를 섬 인근 해역으로 파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상황은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고, 영국 함대 사령관 로버트 베인스 제독의 냉정함만이 전쟁 발발을 막았다. 결정적인 병력과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교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제임스 부캐넌 대통령의 주도로 협상이 진행되어 섬은 12년간 공동 점거되었고, 이 분쟁의 유일한 희생자는 다행히(물론 돼지 본인에게는 다행이 아니지만) 돼지 한 마리로 끝났다.

로버트 베인스 경
돼지 문제는 유럽에서도 또 다른 갈등을 낳았다. 1903년 친오스트리아 성향의 세르비아 왕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암살된 뒤, 새로 들어선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 상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불가리아와 관세 동맹을 체결했다. 모두 빈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빈은 1906년 세르비아 상품, 특히 베오그라드의 최대 수출품인 돼지고기에 대한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 경제 붕괴를 피하기 위해 세르비아는 프랑스, 독일,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며 수출 시장을 돌렸다. 빈은 이를 몹시 달가워하지 않았고, 상황은 무력 해결로 치닫는 듯했다. 마지막 순간에 독일 외교가 공개적인 충돌의 발발을 저지했고, 러시아는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는 협상 조건을 조율해야 했으며, 합의는 1911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발칸의 솥에서 끓어오른 돼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예정보다 일찍 터지게 만들 뻔한 구실이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조용히 무탈하게 노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개 때문에 벌어진 전쟁?
발칸이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크게는 마케도니아와 서부 트라키아를 둘러싼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대립 탓이다. 그 결과 제2차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등 오랜 투쟁이 이어졌고, 1919년 뇌이 조약에 따라 분쟁 지역 대부분은 그리스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불가리아 측은 이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국경에서는 끊임없이 긴장이 끓어올랐다. 전쟁에 지친 두 나라는 1925년 10월, 고작... 개 한 마리 덕분에 다시 전쟁 직전까지 몰렸다.
국경을 순찰하던 그리스 군인이 자신의 애완견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개는 적진 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강아지를 구하려던 그리스 군인은 불가리아 초병의 총격을 받았다. 불가리아 측은 사건을 유감스럽게 여겼지만, 그럼에도 그리스군은 불가리아를 침공해 국경 마을 여러 곳을 점령했다. 국제연맹이 개입해 대규모 교전의 발발을 막았다. 이 소위 '개 전쟁'으로 약 5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대부분은 불가리아 민간인이었다.
위대한 에뮤 전쟁
인류는 동물 때문에 싸우기도 했지만, 동물과 직접 싸우기도 했다. 그런 발상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된 곳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바로 호주에서 말이다.
1932년 여름, 매년 해안으로 이동하던 에뮤 떼가 서호주의 농작물에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계절적 이동 자체는 낯선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규모가 특히 컸다. 새의 수가 무려 2만 마리에 달했다. 농부들은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정부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병사 세 명과... 호주군의 위업을 담아낼 촬영팀까지 '전선'에 파견했다. 국방부에는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표적(시속 최대 50km)에 대한 사격 훈련 기회라는 추가 동기도 있었다.

사살된 에뮤를 든 농부
1932년 11월 2일 시작된 '손쉬운 원정'은 정부 측에 일련의 실패, 아니 패배라고 불러야 할 연속극이 되었다. 원정대 사령관이 노골적으로 바라던 결전은 에뮤들이 응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호주 병사들의 사격 실력마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트럭에 소총을 장착하는 방법도 소용없었다. 에뮤를 추격하던 차량(애초에 새들이 트럭보다 빨랐다)은 길을 벗어났고, 흙길 위의 사수는 단 한 발의 유효 사격도 하지 못했다. 또 한 번은 무리 한 떼가 마침내 물웅덩이에서 포위된 듯했으나 소총이 오작동을 일으켰고, 새들은 능숙한 측면 기동으로 흩어져 버렸다.
결국 에뮤와의 전쟁은 12월 10일에 끝났고, 남십자성 부대에 영광은 가져다주지 못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약 1,000마리가 사살되었고 2,500마리가 부상으로 사망했다. 전쟁 초기 약 2만 마리의 개체 수를 감안하면 이 숫자를 성공이라 부르기 어렵다. 작전 총지휘관 메러디스 소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 새들처럼 총알을 견디는 군사 부대가 있다면 우리는 세계 어떤 군대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탱크처럼 기관총에도 버틴다. 덤덤탄조차 막지 못하는 줄루족 같은 존재다."
또한 메러디스 소령은 한 보고서에서 자기 병력은 아무 손실도 입지 않았다고 언급했다는 점도 짚을 만하다.
역사를 통틀어 인류는 파슬리 한 줌을 두고도(말 그대로) 싸울 수 있었고, 300년이 넘는 전쟁을 지속하기도, 40분도 안 되어 종결짓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