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해(弑害), 수백 년간 금기시된 최중대 범죄
군주를 해치는 행위, 이른바 '시해(regicide)'는 수세기 동안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범죄 중 하나로 여겨져 왔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신이 세운 질서의 산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왕을 해친다는 것은 곧 하늘이 정한 질서 자체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자신의 군주에게 칼을 겨눈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그런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넣었을까요? 권력에 대한 탐욕일까요, 깊은 복수심일까요, 아니면 종교적 광신일까요?

1. 권력과 야망 — 왕좌를 노린 손
가장 고전적인 시해의 동기는 단연 권력이었습니다.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딸의 결혼식장에서 호위관 파우사니아스의 칼에 쓰러졌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왕좌에 올랐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황제 암살이 거의 하나의 '정치 관행'처럼 자리 잡았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시작으로 수십 명의 황제가 친위대나 경쟁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중세와 근세 유럽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왕위 계승 분쟁, 귀족들의 반란, 궁정 음모 속에서 군주의 삶은 언제나 위협받았습니다.
2. 종교와 광신 — 신의 이름으로 휘두른 칼
종교 개혁과 종교전쟁의 시대에는 신념이 시해의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앙리 4세는 1610년 가톨릭 광신도 프랑수아 라발랏의 마차 습격으로 암살당했고,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는 1792년 가면무도회장에서 귀족 음모자들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이후 그의 죽음은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3. 혁명과 재판 — 사형집행인의 도끼 아래
근대에 들어서면서 군주는 암살자의 칼 대신 '인민'과 '법'의 이름으로 세워진 단두대 앞에 섰습니다. 잉글랜드의 찰스 1세는 1649년 의회가 구성한 특별재판에서 반역죄로 처형된 최초의 영국 국왕이 되었고,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1793년 혁명 재판 끝에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1918년에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가 예카테린부르크 지하실에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되며 유럽 왕정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통치자가 비명에 죽었는가?
역사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중세 이후 유럽에서만 수십 명의 군주가 자연사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암살자의 칼, 음모자의 독배, 혹은 사형집행인의 도끼와 단두대까지 — 그 최후의 방식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은 하나였습니다. 왕관을 쓴다는 것이 결코 안전한 운명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시해의 역사는 곧 권력이 얼마나 달콤하고, 동시에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