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직접 끌려간 아이들도 있었고, 절망에 빠진 부모의 품에서 그저 낚아채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나치는 이 아이들이 훌륭한 '독일인'으로 자라나기를 계획했습니다. 과연 제2차 세계대전 중 '인종적으로 우수하다'고 판단된 폴란드 어린이 몇 명이 독일 본토 깊숙이 끌려갔을까요?
전쟁 중 독일로 끌려간 아이들의 정확한 숫자를 오늘날 추산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전후 이들의 귀환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로만 흐라바르(Roman Hrabar)는 그 수가 무려 20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우월 인종'을 양산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인 레벤스보른(Lebensborn)의 남아 있는 문서를 바탕으로 한 독일 측 연구 결과는 이보다 10분의 1 수준인 약 2만 명을 제시합니다.
왜 이렇게 큰 차이가 벌어질까요? 폴란드 아동 납치는 조직적인 작전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독일 점령 초기, 마을과 도시, 지역 단위의 주민 추방과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강제 이주 속에서 사라진 아이들
개전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독일은 바르테란트(Wartheland) 지역에서 세 차례의 강제 이주 작전을 단행했고, 그 희생자는 25만 명이 넘었습니다. 특히 1940년 3월 15일에 시행된 마지막 작전에서는 게르만화 대상으로 선정된 약 2,400명이 독일 본토 깊숙이 이송되었는데, 이 가운데 아이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비슷한 운명은 주비에츠(Żywiec) 주민들에게도 닥쳤습니다. 이곳에서는 1만 5천 명이 쫓겨났고, 체하누프(Ciechanów) 지역에서도 약 1만 2천 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잔혹했던 곳은 자모시치(Zamość) 지역이었습니다. 독일 정착민들을 위한 '식민지 낙원'으로 만들 예정이었던 이곳에서 11만 명이 넘는 폴란드인이 추방당했습니다. 일부는 '재게르만화' 대상으로 분류되었고, 일부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인종적 기준에 미달한다고 판정된 이들은 브제진카(Brzezinka), 즉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이와 동시에 아이들과 영아들은 세밀하게 관찰당하고 신체 검사를 받았습니다. 아그니에슈카 야친스카(Agnieszka Jaczyńska)의 저서 『이제 너희는 독일인이다: 강탈당한 폴란드 아이들의 충격적인 운명』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아이들은 외모, 두개골 구조, 안와 간격,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검사받았습니다. 적절한 연령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게르만화 대상으로 선별되었고, 목에는 'Kinderaktion'(아동 작전)을 뜻하는 Ki 기호가 새겨진 나무 팻말이 걸렸으며, 추가로 번호까지 부여받았습니다.
인종적으로 가치 있다고 평가된 폴란드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무력으로 격리되어 특별 임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체계적인 세뇌를 당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약 4,500명이 영원히 독일로 끌려갔습니다.
영아가 가장 각광받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제3제국이 필요로 하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인구에 대한 갈증은 커져갔습니다. 모든 전선에서 피를 흘리던 독일군, 그리고 모범적인 아리안인을 대량 생산하려던 레벤스보른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폴란드 아동 납치는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새로운 독일인'은 폴란드에서 끌려온 강제 노동자들의 자녀를 빼앗는 방식으로도 확보되었습니다. 선택의 폭은 넓었습니다. 다리우스 칼린스키(Dariusz Kaliński)의 저서 『피해의 대차대조표: 독일의 폴란드 점령은 실제로 어떠했는가』에 따르면, 포로를 포함해 무려 300만에 가까운 폴란드인이 독일의 농장과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치의 관심이 가장 집중된 것은 영아였습니다. 갓난아기라면 아이의 기억을 되돌리는 번거로운 작업 없이도 손쉽게 '독일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종 기준을 통과한 아이들은 위탁 가정으로 보내졌지만, 선별에서 떨어진 아이들의 운명은 처참했습니다. 『이제 너희는 독일인이다』의 저자들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신생아들은 서서히 굶어 죽게 만드는 혹독한 환경에 방치되었고, 동시에 어머니들 앞에서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라도 받는 듯 꾸며졌습니다. 아이가 즉사할 경우 여성들의 통제 못 할 반응이 노동 의욕과 생산성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강제 노동자 자녀들이 특별 시설에서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보여주려던 선전 사진. 『이제 너희는 독일인이다: 강탈당한 폴란드 아이들의 충격적인 운명』에서 발췌.
영원히 잃어버린 정체성
주목할 점은, 아이를 입양한 새 독일인 가족 대부분은 아이의 실제 출생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 또 한 차례의 가족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알로이지 트바르데츠키(Alojzy Twardecki), 옛 이름 알프레트 하르트만(Alfred Hartmann)은 종전 후 수년이 지나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젊은 독일인이었던 그에게 부모가 폴란드인이라는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래, 나는 자부심 넘치는 독일 라인란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광적으로 히틀러 경례를 했고, 폴란드인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으며, 프랑스인을 미워했습니다. 잘 맞춰 입은 독일 군복을 입은 군인들에게 감탄했죠. (...) 나는 그 모든 것을 흡수했습니다. 그리고 수년 뒤, 나는 그 모든 것을 바꾸고 다시 검토해야 했습니다. 내 머리와 마음을 정리하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트바르데츠키는 독일인 양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폴란드로 돌아왔고, 마침내 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극히 드문 사례입니다. 독일에 납치된 아이들 대부분은 정체성과 친부모를 영원히 잃었습니다.
전후 폴란드로 돌아온 아이들은 불과 15~20%에 불과했습니다. 사진은 독일화를 위한 신체 검사와 인종 선별을 당한 아이들을 기리기 위해 우치(Łódź) 피오트르코프스카 거리에 설치된 기념판입니다.
연구서 『이제 너희는 독일인이다』에서 도로테 슈미츠-쾨스터(Dorothee Schmitz-Köster) 박사 역시 이를 확인해 줍니다.
독일 점령기에 폴란드에서 강제로 끌려간 아이들 중 전후 귀국하여 폴란드의 친척이나 위탁 가정과 재회한 이들은 15~20%에 불과합니다. 독일에 남은 이들 상당수는 자신이 폴란드 출신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오늘날에도 자신의 폴란드 뿌리를 모른 채 독일의 도시와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될까요? 아마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기에 흐라바르가 제시한 20만이라는 숫자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