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발포어 선언 70주년: 아랍의 땅 팔레스타인에 약속된 유대인의 '국민의 고향'

역사를 바꾼 짧은 편지

오늘은 아랍인들이 대부분 거주하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선포된 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그 실현의 출발점은 1917년 영국이 내놓은 '발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었다.

1917년 10월 31일, 영국 내각 회의가 오후 초반에 끝나자마자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는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던 영국 시온주의 지도자 하임 바이츠만의 방으로 들어섰다. 사이크스는 그를 맞으며 말했다. "바이츠만 박사, 아들을 얻으셨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것은 훗날 역사에 '발포어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될 짧은 편지였다. 이 편지는 바이츠만 본인이 아니라 영국 시온주의의 또 다른 지도자이자 기행변 은행가 월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이 편지의 내용은 큰 논쟁거리가 되고 있으며, 그 파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자랑인가, 절망인가?

영국 정부는 대체 어떤 동기로 이 메시지를 내놓았을까? 발포어 선언은 초월적 이상주의의 산물이었을까, 아니면 냉혹한 권력 정치의 산물이었을까? 로이드 조지 총리와 외무장관 발포어는 전쟁 후 중동의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넘어올 것을 확신했기에, 가난한 유럽 유대인들에게 그 땅의 일부를 미리 약속해 줄 수 있었다는 걸까?

아니면 전쟁에서 패배할까 두려워,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어떤 작은 가능성이라도 붙잡았던 걸까? 그리고 영국은 유대인과 한 약속을, 프랑스와 맺은 세력권 비밀 협정(사이크스-피코 협정), 그리고 T.E. 로렌스와 헨리 맥마흔이 아랍인들에게 했던 약속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위 질문들 중 어느 하나에도 명확한 답은 없다. 그리고 사람이 선택하는 입장은 대개 현재 진행 중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에서 취하는 입장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질문들과 대비되는 단순한 사실 하나가 있다. 영국은 결국 팔레스타인 개입에서 큰 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국은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권을 손에 넣었지만, 모순투성이였던 약속들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그들의 얼굴을 때렸다. 발포어 선언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 물결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아랍 주민들의 저항을 갈수록 격렬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한쪽을, 때로는 다른 쪽을 편들며 줄타기를 하던 영국은 결국 1948년 꼬리를 내리고 팔레스타인을 떠났고, 그 나라는 피비린내 나면서도 풀기 어려운 분쟁 속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발포어 선언은 성공적인 외교였다고 보기 어렵다.

국가인가, 고향인가

그러나 발포어 선언이 성급한 외교적 실수의 산물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문서가 아니었다. 최종 문구는 윌슨 미국 대통령을 포함해 내각 안팎의 고위 인사들과 긴 협의 끝에 다듬어졌다. 예컨대 '국가(national state)'가 아닌 '국민의 고향(a national home)'이라는 표현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아랍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관계자들은 훗날 처음부터 국가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아랍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명시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조항이 영국 정부가 그들을 얼마나 소홀히 여겼는지 보여준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던 집단에게 '비유대인 공동체'라는 명칭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아랍인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필요 없다는 듯이.

세계 다른 지역의 유대인 정치적 지위에 '침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문구는 유대인 출신 인도 장관 E.S. 몬태규의 요청으로 추가되었다. 그는 다른 많은 반시온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국가 건설이 유럽 유대인들의 지위를 희생시킬 것을 우려했다.

전세가 기울던 1917년, 영국의 계산

여전히 남는 의문은, 영국 내에서 거의 영향력이 없던 인구 집단을 왜 영국이 명시적으로 지지했느냐는 것이다. 영국에게는 이미 해결해야 할 문제가 충분히 많았는데도 말이다. 1917년 가을, 연합군이 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결코 배제할 수 없었다. 프랑스 전선에서는 아무 진전이 없었고, 이탈리아는 카포레토 전투에서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러시아 혁명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전혀 알 수 없었고, 미국의 참전도 늦어지고 있었다.

유일한 밝은 소식은 영국군이 야파와 예루살렘에 접근하면서 중동에서 거둔 가시적인 진전이었다. 머지않아 남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손에 넘어갈 것이었다. 발포어 선언의 발표는 바로 이 상황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선언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은 뒤 이를 내주지 않아도 되는 도덕적 근거를 영국에 제공했다. 그 밖의 이점도 있었다. 영국-유대 동맹은 프랑스와 레바논 기독교도 간 연합에 맞설 만한 훌륭한 카운터가 되었고, 수에즈 운하와 중동 전역 사이에서 영국에 유리한 전략적 위치를 안겨주었다.

또한 이 선언은 미국 여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러시아와 독일 사이 전선에서 유대인의 지원을 동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쟁 자금 조달에 대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순풍이 될 수 있었다. 발포어가 자신의 편지를 기행변 은행가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매일 런던 거리에서 화제를 모으던 인물이었으니, 그는 얼룩말이 앞에서 끄는 마차를 타고 다녔다.

유대인은 영국인이 아니다

그러나 영국이 시온주의를 지지하게 된 데에는 권력 정치만이 작용한 것은 아니다. 문헌에는 발포어가 바이츠만의 영국 방위에 대한 공로에 보답하고 싶었다는 일화가 늘 등장한다. 화학자 바이츠만은 다이너마이트의 필수 원료인 합성 아세톤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6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발포어는 바이츠만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물었다고 한다. "내 민족을 위한 국민의 고향입니다."라고 답한 바이츠만의 말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발포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만 이 대화가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발포어와 로이드 조지 모두 시온주의에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각은 유대인도 영국인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영국인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결코 진정한 영국인이 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조국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