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인류 초기 '인종' 개념의 탄생과 변천사: 칸트에서 블루멘바흐까지

현대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퍼져나간 이후, 수많은 다양한 집단이 등장했습니다. '인종(race)'이라는 용어를 인간에게 처음 적용한 사람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로, 그는 인종을 "세대를 거쳐도 자신의 특성을 유지하며 불변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이 용어는 말의 혈통 순수성이나 왕족·귀족의 가계를 지칭하는 데에만 쓰였으며, 법적 지위와 특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부계 혈통을 명확히 하는 데 필요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박물학자 린네와 블루멘바흐는 '변종(varieties)'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박물지(Naturalis historia)

히포크라테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같은 고전 시대의 사상가들은 이미 인간 집단 간의 외형적 차이를 기술한 바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생명체의 위계적 사다리인 자연의 계단(Scala naturae)에서 인간을 최상위에 위치시켰습니다.

300년 후 대(大)플리니우스는 박물지(Naturalis historia)를 펴냈습니다. 이 일종의 백과사전에는 외형적 차이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눈이 하나뿐인 사람, 거대한 발 하나를 가진 사람, 발이 거꾸로 달린 사람, 개 머리를 가진 사람 같은 황당무계한 환상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그의 백과사전은 중세까지 논쟁 없이 권위를 유지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브뤼셀 출신의 '해부학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인간 집단 간의 실제 차이를 언급할 용기를 냈습니다.

13세기부터 상인들과 선교사들은 긴 여정 끝에 '동방'에서 돌아오며 신비롭고 미지의 민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대항해시대의 위대한 항해를 통해 이들에 대한 지식은 점점 더 넓어졌습니다. 콜럼버스 역시 서쪽 신대륙의 이국적인 주민들과 접촉했습니다. 황금시대에는 VOC(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큰유인원 같은 살아있는 동물뿐 아니라 이국적인 사람들까지 공화국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류의 지리적 다양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초기에는 매우 체계적이지 못했습니다.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아프리카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 후 현지 조건에 대한 적응으로 해석합니다. 새로운 거주지에서는 환경에 더 잘 적응하게 해주는 유전자가 더 널리 퍼졌습니다.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은 고원지대, 극한의 추위, 열대 기후 등 각기 다른 환경에 맞추어 진화했습니다. 습한 정글에 어울리는 넓은 코, 건조한 사바나에서 수분 증발을 막는 좁은 코, 열대의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검은 피부… 인간은 서서히 다양한 서식지에 적응해 갔습니다. 그러나 모든 외형적 특징이 환경과의 관계로 쉽게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가장 검은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인들은 정글이 햇빛을 가려주는 적도 부근에 삽니다.

집단들이 넓게 흩어져 살았음에도 인구 이동, 무역, 군대의 파견, 그리고 물론 우리의 '평화주의적인' 방랑욕 덕분에 접촉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든 서로 번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편견의 역사

유럽인들은 일찍부터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집트에는 흑인 파라오가 있었고 누비아 전사들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시대에 들어서면서 흑인은 '죄'와 '악마'를 상징하는 우의적 존재로 여겨지게 됩니다. 하지만 12~15세기에는 시바의 검은 여왕과 동방박사 중 한 명인 가스파르가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성 모리스도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에서 검은 십자군의 모습으로 조각상에 새겨졌습니다.

그러다 이미지는 뒤집힙니다. 불평등이 신이 부여한 질서라는 주장은 식민주의와 노예 무역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창세기의 한 구절은 술 취한 아버지 노아의 알몸을 본 함이 아들 가나안과 함께 저주받아, 그 대가로 검은 자손을 두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경전 구절들은 흑인 아프리카 노예들이 열등한 존재라는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17~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성경 구절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은 약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오래된 교조적 방법론에서 다소 거리를 두며 자신들의 관찰에 입각한 사고를 할 여지를 얻었습니다. 18세기 후반, 해부학자 페트루스 캠퍼(Petrus Camper)는 다양한 민족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두개골과 큰유인원의 두개골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당시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가능한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안면선(Linea facialis)

캠퍼는 흑인 역시 인간이며 백인과 가까운 친연관계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듯 흑인이 인간과 오랑우탄의 교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는 흑인이 태어날 때는 흰색이고 이후 어두워진다고 보았으며, 유럽으로 이주하면 몇 세대 안에 색소를 다시 잃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따라서 피부색은 '인종적' 특징이 아니라고 캠퍼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백인을 '흰 무어인'이라 불렀고, 아담과 하와가 백인이었는지 흑인이었는지는—당시 뜨거운 감자였음에도—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캠퍼는 인체 비례에 관한 법칙을 세웠고, 얼굴 아랫부분이 얼마나 돌출되어 있는지를 수치로 나타내는 안면선(linea facialis)을 도입했습니다. 그는 백인 우월론에 명확히 반대하고 노예제에도 반대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얼굴 이론은 세대를 거치며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데 악용되고 말았습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칼 폰 린네가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에서 동식물 종을 분류한 뒤, 1758년 제10판에서 그는 마침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는 고대의 원소 이론에 일부 기초하여 네 가지 지리적 변종을 구분했습니다. 낙관적인 유럽인(흰색, albus), 우울한 아시아인(노란색, luridus), 담담한 아프리카인(검은색, niger), 그리고 화를 잘내는 아메리카 원주민(붉은색, rufus)입니다.

괴팅겐의 해부학자 요한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는 지리 외에도 피부·머리카락·눈의 색소와 신체 측정치를 분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제임스 쿡의 남태평양 항해 기행문을 읽은 뒤 그는 다섯 번째 변종을 추가했습니다. 코카서스(백인) 인종, 몽골로이드(황인) 인종, 말레이(갈색) 인종, 에티오피아(흑인) 인종—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 포함—, 그리고 아메리칸(적색) 인종입니다.

아프리카인들을 직접 만난 뒤 블루멘바흐는 자신의 이전 묘사—다소 희화화된 것이었습니다—를 철회하고, 그들의 뛰어난 재능과 정신력을 찬양했습니다. 또한 집단 간에 점층적인 과도 단계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아프리카 주민들은 유럽인과의 차이보다 서로 간의 차이가 더 크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두 세기 뒤 인종 개념에 반박하는 강력한 논거로 제시됩니다.

혼혈과 교차

북미에서는 백인과 원주민 또는 흑인 노예의 혼합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반면 중남미에서는 식민지 건설 이후 현지 원주민과의 혼합이 장려되었습니다. 다양한 조합의 혼혈 자녀들에게는 메스티소(유럽인×원주민), 물라토(유럽인×아프리카인), 모리스코(유럽인×물라토), 참부조(중국인×원주민) 같은 이름이 붙었습니다.

수리남에서는 주로 크레올이 유럽인, 유대인, 중국인과, 그리고 덜하게는 힌두스탄인, 자바인, 인도인과 혼합되었습니다. 이 혼합 집단은 오늘날 '도시 크레올'이라 불립니다. 반면 정글의 강변에 사는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우드랜드 흑인들은 결코 혼합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블루멘바흐는 아담과 하와가 밝은 피부였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견해로는 어두운 자손은 영양실조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언제든 '백인' 외모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8세기에 종교철학자 요한 고프리트 헤르더는 스승 칸트의 경직된 인종 개념을 거부하고, 인종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럼에도 인종은 계속해서 많이 다뤄지는 주제였습니다. 19세기 영국 총리 디즈레일리는 "모든 것은 인종이다, 그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고 썼습니다. 당시에는 통상 쿠비에의 3분법—'코카서스', '네그로이드', '몽골로이드'—이 인용되었고, 이후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으로 '현대화'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직모형'과 '권모형' 같은 다른 분류들이 있었고, 때로는 무려 400개에 이르는 인종이 구분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측정

인간 집단을 구분하려는 시도 속에서 객관적인 생체 계측이 점차 중요해졌습니다. 신체의 고정된 측정점들이 정의되고, 특수하고 표준화된 장비로 치수가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별도의 학문 분야인 골상학(phrenology)이 탄생했습니다. 이는 두개골 측정과 정신 탐구를 결합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야의 선구자는 독일 의사 프란츠 요제프 갈(Franz Joseph Gall, 1758–1828)입니다. 그는 해부학 실험실에서 소위 정신병원과 감옥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특별한 충동·성향·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관찰했습니다. 그는 이들에게 자신의 장단점을 상세히 이야기하게 하고, 그 데이터를 두개골 측정치와 연결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두개골과 관련된 5천 가지가 넘는 성격 유형을 기술했는데, 모든 두개골을 직접 만지고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언어 재능'과 '수학 재능' 같은 것들도 이때 기술되었습니다.

그는 두개골의 형태를 해당 인물의 직업과도 연결했습니다. 단순한 재봉사는 낮은 이마를 가진 둥근 머리를, 학식 있는 의사는 높은 이마를 가진 길쭉한 머리를 지녔다는 식이었습니다. 남성에게서는 투쟁심, 결단력, 지능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두개골 융기를 발견했다고 했고, 여성에게는 다른 융기에 애정, 아이 같은 순수함 등의 특질을 배정했습니다.

두개골의 형태와 내용을 특정 성격 특질과 연결함으로써, 범죄자도 외모로 식별할 수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여기서 후에 범죄인류학이 파생되었으며,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롬브로소(Cesare Lombroso, 1835–1909)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스웨덴 연구자 안데르스 아돌프 레치우스(Anders Adolf Retzius)는 1842년 두개골 지수(head index)—두개골의 최대 폭과 최대 길이의 비율—를 도입했습니다. 지수가 높으면 단두형(brachycephalic), 낮으면 장두형(dolichocephalic)이라 불렀습니다.

다윈이 혁신적인 진화 개념에 관한 획기적인 저작들을 발표하던 무렵인 1856년, 최초의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상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의사들은 진료실 옆에서 옛 뼈를 측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중세 초기 프리슬란트 테르프(인공 언덕)에서 출토된 좁은 두개골과 제일란트의 둥근 두개골을 비교했습니다.

그때부터 두개골 컴퍼스는 발굴된 골격 재료를 기술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었습니다. 산 사람의 신체 치수와 색소도 연구 대상이 되었고, 이를 통해 프리슬란트인, 갈리아인, 켈트인 같은 유형학적 용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유형학의 이면에는 인종이 정적인 실체라는 암묵적이고 경직된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제일란트의 의사 드 만(De Man)은 로마 가톨릭 신자와 유대인을 모두 이질적 요소로 간주하여 개신교도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주더해(Zuiderzee) 제도의 골격 재료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당시 그 섬들의 고립된 위치 때문에 독특한 발달이 이루어졌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마르켄(Marken) 두개골의 기묘한 편평화는 게르만 튜턴족의 영향을 나타내는 것일까, 아니면 어쩌면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일까? 1912년 해부학자 바르게(Barge)가 더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마르켄에서 어린 소년과 소녀 모두가 두개골이 자라는 동안 꽉 끼는 전통 모자를 써서 생긴 변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1900년경 해부학자 루이 볼크(Louis Bolk)는 네덜란드인을 유형에 따라 분류했습니다. 금발에 푸른 눈의 단두형 작센인, 금발에 푸른 눈이지만 중두형인 프리슬란트인, 그리고 국가 남부의 어두운 피부의 단두형 알프스 유형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4분의 1세기가 지난 뒤 이런 경직된 유형학은 점점 금기시되었습니다. 어차피 어떤 개인도 하나의 범주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