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개신교 공화국의 가톨릭 신자들, 침묵하는 희생자가 아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팔십년 전쟁) 기간 동안 개신교 통치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의 공개적인 신앙 고백을 일체 금지했다. 당시 가톨릭 신자들이 이러한 억압 속에서 일상을 어떻게 견뎌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이번에 처음 이루어졌다.

공적 신앙의 박탈

1580년경 네덜란드 공화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벌금, 투옥, 추방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종교를 공적으로 실천할 권리를 잃었다. 한때 지배적이었고 어디에나 존재하던 신앙은 이제 거실 안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성인상들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성체 행렬과 찬송은 금지되었다. 원래 가톨릭 교회였던 건물들은 개신교 교회로 바뀌었고, 수도원은 공공 소유가 되었으며 교회 재산들은 몰수되었다. 사제들은 더 이상 미사를 집전하거나 성사를 집행할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 있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공화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산사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전직 가톨릭 시장조차 이제 2등 시민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개신교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신앙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라이덴 대학교의 역사학자 카롤리나 레나르두치(Carolina Lenarduzzi)는 1570년부터 1750년까지 공화국 내 가톨릭 신자들의 세계를 연구했으며, 편지와 일기 같은 자기표현 문서(ego-document)를 바탕으로 그들의 내면 깊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개신교 공화국의 가톨릭 주민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자신들의 눈에 비가톨릭 신자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없었다. 레나르두치의 가장 주목할 만한 결론 중 하나는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보여준 적극적인 태도다. "역사학자들은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들을 수동적인 피해자로 묘사해 왔지만, 그들 스스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주도해 나갔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가톨릭 신자들은 금지된 공적 공간에서 신앙을 드러내는 데 놀라울 정도로 창의적이었다. 특정 방식으로 옷차림을 하거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호원(almshouse)을 설립하는 식이었다. 그런 안뜰 중 하나에는 '선행(good works)'을 새긴 박공석이 있었는데, 이는 전형적인 가톨릭적 개념으로 개혁교회 신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집이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모두에게 드러나 있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지만, '우리는 여기 있다'는 메시지는 모두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또한 자신들이 사랑하는 도시 안에서 자신들의 몫을 지키고자 했다. 레나르두치는 그들이 도시에 깊은 충성심을 보였으며, 역사에서 자신들이 지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의 신앙을 암시하는 모든 흔적은 사라져 있었고, 마치 그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빈민 구호원 설립과 같은 다양한 전략을 동원해 도시와의 끊어진 유대를 회복하고 완전한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으려 했다.

은밀한 교회에서 울려 퍼진 노래

자신들이 여전히 존재감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가톨릭 신자들은 기발한 방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은밀한 교회(schuilkerk) 안에서 아주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러 밖의 항의자들에게까지 들리도록 했습니다. 개신교 목사들은 이 때문에 특히 짜증을 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조치 여부는 도시마다 달랐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암스테르담, 위트레흐트, 하를렘에 거주했고, 이들 도시의 정부는 엄격했던 도르드레흐트나 라이덴보다 관용적이었다.

은밀한 교회는 가톨릭 신자들이 비용을 부담하는 한 묵인되고 방치되었다. 위치 역시 대개 비밀이 아니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했다. 이는 정부가 도시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이었지만, 불안한 시기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활동 공간이 다시 제한되곤 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큰 소리로 노래한 것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혼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레나르두치에 따르면 그들은 종교 음악이 지니는 호소력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익숙한 찬송가를 들을 때 마음이 움직였다. "일기 기록에 따르면 음악이 개신교 신자들을 개종시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물론 편향된 자료이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개종에 있어 자신들의 최대 무기로 여긴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마지막 성사

이 연구의 특징은 1등 시민에서 2등 시민으로의 전환에 대해 가톨릭 신자 각각이 저마다 다르게 반응했다는 점이다. 레나르두치에 따르면 따라서 단일한 '가톨릭 정체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질적인 공동체였고, 서로 다른 유형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굳건한 경계는 없었습니다.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신앙을 접어둔 사람과, 지하로 숨어 명예 회복을 위해 싸운 더 급진적인 사람 사이에는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했습니다."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평생 동안 이러한 여러 정체성 사이를 오갔다. 그러나 어떤 가톨릭 신자도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은 임종의 자리에서 받는 마지막 성사였다. "이 마지막 성사가 없으면 영원한 생명을 잃고 '짐승처럼' 죽는다고, 그들은 일기에 공포를 담아 기록했습니다."라고 역사학자는 전한다.

반항적인 남부 신자들

북부 지역과 남부 총괄령(Generality Lands)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의 경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브라반트와 림부르흐를 포함하는 후자의 지역은 북부보다 50년 늦게야 개신교 세력의 손에 넘어갔다. 총괄령 지역은 국가 행정에서 발언권이 없는, 네덜란드 의회(States General)에서 투표권조차 없는 사실상의 점령지였다. 스페인 통치 시기에 주민들은 가톨릭 신앙을 지켜왔으며, 공화국 통치 하에서도 신앙이 공적 공간에서 사라졌음에도 가톨릭 다수파로 남았다.

현대 역사학에서 총괄령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은 아직 북부의 신앙 형제들과 비교된 적이 없었다. 레나르두치는 남부의 가톨릭 다수파가 강한 자의식을 지닌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결론짓는다. 이 가톨릭 하위문화는 훨씬 더 자주 반문화(counterculture)로 변모했으며, 가톨릭 신자들은 물리적 폭력에 호소해 개혁교회 신자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지역에서 훨씬 더 자주 반란을 일으켰지만, 반면에 애국심도 엿볼 수 있습니다. 1672년 프랑스가 공화국을 침공하고 전국에 반가톨릭 정서가 만연했을 때,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조국에 대한 충성이 종교보다 우선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활동 여지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한몫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