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에서 잊혀진 대도시가 발견됐다. 고고학자 카림 사드르(Karim Sadr)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아직 조사를 진행 중이며, 지금까지 밝혀진 성과는 모든 기대를 뛰어넘고 있다.
수커보스란트 자연보호구역의 폐허
요하네스버그 근교의 수커보스란트(Suikerbosrand) 자연보호구역에는 수많은 폐허가 흩어져 있다.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으며 약 200년 전 내전으로 취락이 끝났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위트워터스랜드 대학교의 카림 사드르 교수는 이에 대해 더 알고 싶어 10년 전부터 폐허에 대한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를 시작했다.
식물을 뚫고 보는 라이다(LiDAR)
사드르와 학생들은 먼저 구글 어스(Google Earth)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해당 지역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그러나 우거진 식생이 시야를 너무 많이 가려 한계에 부딪혔고, 이후 라이다(LiDAR) 기술이 도입됐다. 라이다는 항공에서 식생을 '관통'해 지형을 볼 수 있는 레이저 기술이다.
"라이다는 레이더와 원리가 같지만, 전파 대신 레이저 빛을 사용합니다. 장비를 실은 항공기가 지역 상공을 비행하며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고, 빛이 무언가에 부딪히면 반사되어 돌아오는데 그 왕복 시간으로 거리를 측정합니다"라고 사드르는 설명했다. 이 기술 덕분에 과학자들은 구글 어스로 확인할 때보다 무려 4배나 많은 건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구글 어스에서는 식생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라이다를 통해 드러나면서, 이 도시의 실제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년부터 라이다 데이터 분석이 시작됐고, 서서히 펼쳐진 모습은 모든 예상을 초과했다. "고대 도시에 대한 이야기와 유적 자체는 알려져 있었지만, 이 지역이 얼마나 도시화돼 있었는지 지도로 그려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건물들이 아니라, 이 지역 최대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기후 변화가 불러온 몰락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츠와나(Tswana) 공동체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여러 왕국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각 왕국은 수도와 그 주변 토지로 구성됐다. 사드르는 "남아프리카 동부와 남부 어디에도 이 규모의 도시는 없었다. 19세기 초에는 서쪽으로 더 멀리 가야만 이런 도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때 번영을 누렸던 이 도시는 1800년대 초, 기후 변화와 식민주의가 낳은 전쟁 속에서 파괴됐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농사짓기가 어려워졌고, 남쪽의 농부들과 새로운 영국 정착민들이 더 나은 땅을 찾아 해안 지역에서 내륙으로 이주했다. 줄루 왕 샤카(Shaka Zulu) 역시 남동쪽에서 왕국을 확장해 나갔다. 이것이 도미노 효과를 일으켜 피난민과 약탈 군대가 점점 더 내륙 깊숙이 밀려들었다.
사드르는 "모두가 서로와 싸웠습니다. 1824년에서 1827년 사이 남쪽에서 온 은데벨레(Ndebele) 대집단이 강력한 군대와 함께 도시 근처에 정착해 큰 혼란을 일으키며 도시 일부를 파괴했습니다. 남겨진 주민들의 운명은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번영하던 도시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착민들은 그 땅을 '텅 빈 땅'이라 주장하며 차지했고, 그 위에 광업 도시 요하네스버그가 세워졌다.
급하게 떠난 사람들의 흔적
그런데 전쟁으로 파괴된 가옥들이 가장 오래된 건물은 아니었다. 사드르는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석벽을 발견했다. "1550년경까지는 농장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이후 건축 양식이 변하면서 주민들이 언덕 위에 모여 사는 호몬스테드(homestead, 가족 거주 단지)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지금까지 세어낸 호몬스테드는 총 900개다. 하지만 이들이 동시에 거주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도시 인구 추정이 쉽지 않다. "호몬스테드 하나에 평균 10~20명이 살았으니 인구는 9천~1만8천 명으로 계산됩니다. 저는 도시 전성기 인구를 1만 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전쟁이 도시 전체를 한꺼번에 파괴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그 후에도 계속 살았는지이다. "유물들을 보면 사람들이 급하게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냄비, 솥, 생활용품 등 많은 물건들을 두고 갔거든요. 지금까지 조사한 세 개 호몬스테드에서 그 증거가 확인됩니다." 다만 사드르는 호몬스테드의 화려한 건축과는 전혀 다른 매우 소박한 가옥들도 발견했기 때문에, 파괴 이후에도 사람들이 계속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왕이 있었지만 민주적이었던 사회
호몬스테드는 안뜰을 중심으로 본채와 부속 건물들로 이뤄졌다. 여기에는 가족의 남성 가장이 때로는 열다섯 명에 이르는 아내들과 함께 살았고, 아내들마다 안뜰 안에 자신의 집을 따로 두었다. 가장 큰 호몬스테드, 즉 왕의 거처에는 중앙 집회 장소가 마련돼 있었다. 사드르는 이 도시에서도 그런 넓은 공간을 찾아냈다. "자연 언덕으로, 왕이 회의를 진행하며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츠와나 공동체 안에는 강한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왕이 각 구역의 족장을 임명했고, 가장들은 족장 아래에 속했다. "그러니까 이 성인 남성들은 모두 정치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서로 협상했고, 왕이 혼자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민주적인 체제였죠. 위계질서 아래에 있던 젊고 성숙한 남성들은 가축 치기를 맡았습니다. 종교 중심지는 없었지만 일부 사제와 주술사가 살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공구들이 발견돼 장인의 존재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성들은 농사와 가사 노동을 도맡았습니다."
츠와나 공동체에서는 소를 많이 가진 사람이 곧 부자였다. 도시에 소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건물들이 크고 풍부한 건축 양식을 지녔다는 점은 분명하다. "가축은 보호가 필요했습니다. 여러 건물들이 큰 무리의 존재를 시사합니다. 이 도시가 이 지역에 필적할 만한 곳이 없을 만큼 부유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가축의 가치는 장례 풍습에도 반영돼 있다. "도시 안에는 표식이 있는 무덤이나 공동묘지가 없습니다. 여자는 집 뒤에, 남자는 축사를 둘러싼 울타리 아래에 묻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왕의 중앙 축사 근처에서 탑 같은 구조물을 발견했는데, 아직 기능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엘리트 무덤의 표지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조사
도시의 윤곽은 드러났지만, 사드르와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풀어야 할 큰 물음이 많다. "여기에 몇 명이 살았는지, 엘리트는 누구였고 어디에 살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도시의 어느 부분이 오래되고 어느 부분이 새것인지, 갑작스럽게 버려졌는지도 아직 모릅니다. 몇 가지 가설은 있지만 그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그 작업에는 앞으로도 수십 녀이 걸릴 겁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