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Sukarno)와 모하마드 하타(Mohammad Hatta)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며 국제 사회의 승인과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훨씬 전부터 인도네시아 활동가들은 국제 무대에서 자결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이 초기 '대사들'은 누구였으며, 어디에서 지지를 얻으려 했을까요?
네덜란드령 동인도 밖에서도 벌어진 저항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에 맞선 인도네시아의 저항을 떠올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네덜란드령 동인도 자체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생각합니다. 탈식민지 전쟁(1945~1949년 '경찰 행동'으로 알려짐) 당시 자바의 논에서 네덜란드 병사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소규모 전투 부대의 모습이나, 대중 집회 앞에서 격렬한 연설을 하는 수카르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또한 스위스 역사가 레미 림파흐(Rémy Limpach)가 최근 발표한 파장을 일으킨 논문 이후로는 고문, 즉결 처형 등 네덜란드군이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한 전쟁 범죄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내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며, 1945년 이후에야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인도네시아 탈식민지 전쟁이 발발하기 20여 년 전부터 인도네시아 활동가들은 조국의 국경을 훨씬 넘어 독립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학생들은 파리 라틴 지구(Quartier Latin)에 정치국을 설립했고, 브뤼셀에서 열린 주요 반식민지 국제 회의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1945년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새 지도자들이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입니다.
학생들의 로비 조직, 페림푸난 인도네시아
1920년대 인도네시아 독립을 추진한 핵심 단체는 페림푸난 인도네시아(Perhimpunan Indonesia, 인도네시아 협회, 이하 PI)였습니다. 이 학생 협회는 네덜란드에서 유학 중이던 수십 명의 자바, 암본, 수마트라 출신 학생들을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1908년 인디셰 베레니힝(Indische Vereeniging)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단체는 처음에는 주로 사교 모임에 가까웠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도네시아'라는 새 이름을 내건 PI는 네덜란드로부터의 신속하고 무조건적인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협회 기관지 '인도네시아 메르데카(Indonesia Merdeka, 자유로운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인도네시아인들의 경제적 박탈과 낙후성을 끊임없이 비판했고, 학생들은 인도네시아 신문과 단체에 대한 검열과 정치적 탄압에도 맞섰습니다.
그들의 글에서 PI 학생들이 네덜란드 체제와의 투쟁을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는 국제 운동의 일부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열망은 영국령 인도의 간디나 터키의 아타튀르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PI는 회원들(약 60명)에게 세계 각지의 반식민지 투쟁에 관심을 갖게 하고, 해외 정치 단체들에게 인도네시아 문제를 알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파리, 런던, 베를린에 머물던 세계 각지의 민족주의자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점도 이들에게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평화주의 회의 무대에 서다
1925년부터 PI는 학생들을 파리와 베를린으로 파견하고, 브뤼셀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회의에 대표단을 보내 '인도네시아'의 존재와 그곳의 독립 운동을 알렸습니다. 예를 들어 26세의 아르놀드 모노누투(Arnold Mononutu)는 식민지 출신 학생과 활동가들로 붐비던 파리 라틴 지구의 한 호텔 방을 빌렸습니다. 그는 부모님께 권위 있는 파리정치대학(Institut d'études politiques)에 유학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 시간을 인도 민족주의자, 베트남 공산주의자, 프랑스 지식인들과의 인맥 구축에 사용했습니다.
네덜란드의 PI를 대표하여 모노누투는 1926년 아시아 문명 연구협회(Association pour l'Étude des Civilizations Orientales)의 이사가 되었습니다. 이 소규모 준정치 단체는 아시아 문화의 가치를 강조했으며, 인도, 중국, 베트남 민족주의자들도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조국의 더 큰 자율성과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모노누투는 또한 1926년 8월 파리 근교 비에르빌(Bierville)에서 열린 대규모 평화주의 회의에 PI가 참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주로 프랑스와 독일의 평화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이 모인 이 회의에서 PI는 '아시아 진영'의 일원으로서, 피식민 민족이 자유롭지 않다면 세계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브뤼셀, 제국주의 반대 동맹 창립 대회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 홍보 노력의 가장 큰 성과는 1927년 2월 브뤼셀에서 열린 제국주의 반대 동맹(League against Imperialism) 창립 대회에 PI가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이 동맹은 독일 공산주의자 빌리 뮌첸베르크(Willi Münzenberg)의 주도로 만들어졌으며, 그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서방과 피식민 세계의 공산주의 및 반식민지 민족주의 단체들을 최대한 많이 규합했습니다. 137개 단체와 300명의 참석자 가운데에는 하타뿐만 아니라 인도 국민회의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중국 국민당(쿠오민탕) 관계자, 남아프리카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활동가, 그리고 확고한 반제국주의자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브뤼셀 회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반식민지 세계에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하타는 45분간의 연설에서 조국의 풍요로움과 더불어 오랜 억압과 수탈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참석자들은 결의안을 통해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네덜란드 정부에 즉각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향한 노력을 촉구했습니다. 회의 후 하타는 동맹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를 통해 PI는 반식민지 네트워크 안에서 지속적인 인맥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좌절된 선전 활동과 그 이후
그러나 PI가 유럽 반식민지 네트워크에서 누린 우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네덜란드 당국은 학생들에게 정치 활동 중단을 강하게 압박했고, 하타와 세 명의 학생을 수개월간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1927년부터 PI는 회원 모집과 효과적인 선전 활동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공산주의 진영과 사회민주주의 진영 간의 국제적 대립 또한 제국주의 반대 동맹과 같은 포괄적 정치 플랫폼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었는데, 집단 정치에 대한 지지가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PI의 국제 협력 노선은 1930년대에 이어지지 못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례들은 수카르노와 하타가 독립을 선포하기 훨씬 전부터,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런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인도네시아'라는 국가의 위상이 이미 준비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모하마드 하타는 스무 살 무렵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자의 조국에서 하나둘 권력을 장악하게 될 반식민지 엘리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국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1945년 8월 30일, 독립 선언 후 2주일도 지나지 않아 하타가 옛 인맥에 호소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에 있든 옛 동지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새로 취임한 부통령은 파리, 브뤼셀 등지에서 함께했던 나날들을 회상하며, 네덜란드 통치에 맞서 싸우는 인도네시아를 인정하고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국주의 반대 동맹에서의 협력은 1955년 반둥 회의에서도 그 흔적을 드러냈습니다. 이 회의에는 미국과 소련 간의 권력 정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수많은 제3세계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개최국 대표로서 회의를 연 수카르노는 이 회의가 제국주의 반대 동맹과 같은 정신으로 열린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많은 존경하는 대표님들은 그 회의에서 먼저 만나 독립을 위한 투쟁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