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청동기 시대 서프리스란트 농부들, 세대를 이어 이어진 공동체 삶과 협력

청동기 시대 서프리스란트(West Friesland) 지역의 농부들은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지역에 정착했으며, 공동체 전체가 함께 배수 시설을 관리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우터 로싱(Wouter Roessingh)의 박사학위 연구를 통해 처음으로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네덜란드 남부와는 다른 정착 방식

중기·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800년) 네덜란드 남부의 농장들은 서로 넓게 흩어져 있었고, 농부들은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반면 서프리스란트에서는 농부들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모여 살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오래 한곳에 정착했는지는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로싱은 서프리스란트의 정착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끝에, 농부들이 마을 단위로 여러 세대에 걸쳐 함께 살았으며 마을을 공동으로 유지·관리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낡은 데이터, 새로운 분석

연구 과정에서 로싱은 농가, 경작지, 묘지 사이의 관계를 분석했습니다. 특히 그가 활용한 자료는 지난세기에 수집된 것들입니다. 1970년대 말 토지정비 사업이 시작되기 전, 서프리스란트에서는 급하게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당시에는 시간과 자원이 부족해 연구 결과가 충분히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후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고고학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당시 고고학자들이 세운 가설들을 검증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고고학자로 일하던 로싱은 예전부터 이런 가설들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2009년 엔크하위젠(Enkhuizen) 발굴에서 우리는 마을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의 모형에 따르면 그 장소에는 주거가 불가능했어야 합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서프리스란트의 높은 지대에만 가옥을 지었고, 나머지 땅은 너무 습해서 접근하지 않았다고 여겨졌거든요. 실제 역사는 훨씬 더 복잡했고, 저는 그 진상을 알고 싶었습니다." 로싱은 이후 기존의 모든 옛 데이터를 정리하고 재분석했고, 그 결과 몇 가지 획기적인 통찰을 얻어냈습니다.

뒤집힌 가정들

많은 사람들은 선사시대 네덜란드 서부가 광대한 습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청동기 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이곳은 비교적 평탄한 지역으로, 동쪽에는 담수호가 있었고 곳곳에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그 숲에는 갈색곰이나 무스 같은 대형 야생동물이 살았죠. 이들의 뼈가 이 지역에서 발굴되었는데, 점토 속에 워낙 잘 보존되어 동위원소 분석만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까지 추적할 수 있습니다." 로싱의 설명처럼, 서프리스란트 토양의 뛰어난 보존 환경 덕분에 유럽 어디에서도 이곳만큼 뼈와 경관이 잘 보존된 곳은 없습니다.

비교 연구를 진행하면서 로싱 자신도 무의식중에 현대적인 이미지를 청동기 시대에 투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큰 계시였던 것은, 말뚝이나 도랑으로 구획된 '마당'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무의식적으로 청동기 시대에 적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런 형태의 마당은 훨씬 후대에 등장합니다. 우리는 청동기 시대의 도랑을 수없이 발견했지만 개별 가옥의 마당은 재구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밝혀진 것은, 이 도랑들이 공동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도랑은 때때로 수백 미터에 달했으며, 개별 농가가 아니라 마을 전체, 즉 모든 가옥을 아우르는 경계이자 배수 시스템 역할을 했습니다.

로싱은 도랑의 예상 밖 길이 외에도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을 강조합니다. "단단한 땅에 이런 도랑을 파는 것은 엄청난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이는 주민들이 도랑을 함께 파고 함께 관리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겹겹이 쌓인 경관

모든 기존 예상과 달리, 서프리스란트의 농부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장소에 계속 거주했습니다. 로싱은 데이터 속에서 '겹겹이 쌓인 경관(stacked landscape)'을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농가와 도랑이 거의 같은 자리에 반복해서 건설되고 파인 것입니다.

"보벤카르스펠(Bovenkarspel) 인근에서는 기원전 1500~1100년 사이에 최소 100채 이상의 농가가 발견되었습니다. 한 농가가 얼마나 오래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약 25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400년 동안 약 6채의 농가가 동시에 존재했던 셈입니다. 마을의 경계를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로싱은 총 125채의 농가 평면도를 분석했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농가가 짧은 변을 동서 방향으로 두고 지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설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습관 때문일까요? 아니면 서풍이 많이 불어 집 안을 시원하게 통풍시키기 위해서일까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가축을 위한 별도의 출입구

농가는 길이 15~19미터, 폭 6미터 정도의 긴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바닥 유구에서는 방 구분, 축사, 화덕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로싱은 농가 안에 '업무 공간', 즉 가축을 돌보는 구역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종전의 가설로는 추가 기둥이 있어야만 축사의 증거로 볼 수 있었습니다. 하저 저는 모든 평면도에서 집의 동쪽 짧은 변 쪽 도랑이 끊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가축과 수레를 위한 출입구였을 것으로 봅니다. 서쪽의 도랑 위에 판자를 걸쳐 건너는 것보다 훨씬 편하게 농가에 들어올 수 있었겠죠."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국립고대박물관 선사시대 큐레이터 루크 암크로이츠(Luc Amkreutz) 고고학자는 이 가설이 타당하다고 평가합니다. "다만 인산질 같은 거름 성분이 해당 구역 토양에서 많이 검출되는지 확인하는 등 추가 검증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이번 연구는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발굴 자료 뒤에 얼마나 방대한 정보가 숨어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그는 이어 말합니다. "로싱은 정착지, 경작지, 필지, 무덤, 초기 수리 시설을 하나의 맥락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통합적으로 바라봅니다. 새로운 농가를 짓고 도랑을 파는 과정에서 공동체 전체의 유대감과 헌신이 드러난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는 계획된 경관이라 할 만합니다."

열린 공동체, 해안의 농부들

로싱의 연구는 서프리스란트를 대상으로 하는 '해안의 농부들(Farmers of the Coast)'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지역 농부들이 사육한 소의 뼈도 함께 분석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 떼가 전혀 현지산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소의 일부는 브라반트, 림버흐, 네덜란드 동부 같은 모래 토양 지역에서 들어왔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청동기 시대 주민들이 가축 사육과 에머밀, 보리, 아마씨 같은 작물 재배는 물론, 수렵과 어로, 야생 식물과 과일 채집으로 생계를 이어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농가에는 친족 15~20명이 가축과 함께 거주했으며, 가축은 소 약 5마리, 돼지 3마리, 염소 또는 양 10마리 정도였습니다.

농가들이 모여 작은 취락을 이루었는데, 이 마을들은 결코 폐쇄적이지 않았습니다. "서프리스란트 발굴에서는 스칸디나비아산 부싯돌 도구, 영국산 청동, 독일과 덴마크산 도자기와 장신구 같은 사치품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기후 위기와 대이동

로싱은 중기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마을 구조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도 확인했습니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사람들은 무리 지어, 아마도 제방 위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배수를 위해 더 깊은 도랑을 팠습니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가 끝나가는 기원전 800년경, 사람들은 서프리스란트를 떠납니다.

"기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페흐트(Vecht) 강의 배수 변화로 동쪽 호수들이 범람했고 해수면도 상승했습니다. 경관은 점점 더 습해졌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을 떠났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우리가 익히 알던 '습지의 나라 네덜란드'라는 이미지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