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허드슨이 1609년 탐사를 마친 뒤에도, 이곳에 어떤 형태의 식민지가 들어서야 할지는 당장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해외 무역 거점이 될 것인가, 아니면 농부와 장인들이 정착할 지역이 될 것인가. 두 선택지 사이의 갈등은 뉴네덜란드 40년 역사 내내 끊임없이 이어진 숙제였습니다.
식민지 초기에는 현지 인디언들이 공급하는 비버 가죽 무역이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원정대들은 '팩토리', 즉 소수의 네덜란드인이 임시로 거주하는 작은 무역소를 세웠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아드리안 블록(Adriaen Block)으로, 그는 1614년에 제작한 지도에서 처음으로 '뉴네덜란드'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1621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12년 휴전이 끝나자 스페인과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네덜란드 의회는 아메리카에서의 무역과 사략 활동을 위해 서인도회사(WIC)를 설립했습니다. 이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식민지에 보다 안정적인 농민 인구가 필요했습니다. 무역소와 요새에 물자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624년 WIC가 주장한 영토는 허드슨·델라웨어·코네티컷이라는 세 대하의 하구에서 내륙 약 400km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사이에 끼어 있어 양국의 노린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이주와 종교의 관용
첫 정착민 30여 가족이 1624년 노텐 에일란트(Noten Eylant, 오늘날의 거버너스 섬)에 도착해 이곳에서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흩어졌습니다. 통치권은 WIC가 임명한 총독의 손에 있었고, 그곁에 주민 평의회가 있었지만 발언권은 미미했습니다.
처음 주장했던 영토는 방어하기에 너무 넓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국경을 따라 인접 식민지에서 정착민들이 밀려들었고, 내륙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던 마히칸족과 모호크족 간의 전쟁 때문에 위험했습니다. 이는 WIC가 감당할 의향이 있는 것보다 많은 병력을 요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민지는 수도 뉴암스테르담이 있는 맨해튼과, 오늘날 올버니 너머 허드슨 강 양안의 넓은 지역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당시 베버위크(Beverwijck)라 불리던 이곳은 변경 마을에서 모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1664년 영국에 넘겨질 당시 뉴네덜란드에는 여러 지역에 걸쳐 약 8,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곳은 약 2,500명의 뉴암스테르담과 1,000명의 베버위크였으며, 그 밖에도 125~200명 규모의 마을이 스무 개 가까이 있었습니다. 전체 주민의 절반 이상이 농부, 거의 3분의 1이 군인, 4분의 1이 장인이었습니다. 담배와 함께 비버 모피는 중요한 수출품이었는데, 회사는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독점권을 누렸습니다. 뉴암스테르담에는 큰 항구가 있어 영국인과 프랑스인들도 이곳을 통해 유럽으로 물품을 실어 날랐습니다.
뉴네덜란드 정착민의 절반은 본래 네덜란드 공화국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피신했다가 아메리카로 건너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에 비해 뉴암스테르담은 국적과 종교의 다양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러한 관용은 주로 실용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지도부는 까다롭게 고를 처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개혁교회 신앙이 압도적으로 선호되었지만, 인구 증가와 경제 활성화를 촉진하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종교적 자유가 필수적이었습니다. 길드가 없었고 주민들은 거의 모두 법적 권리를 동반하는 시민 지위를 누렸습니다. 이것 역시 뉴잉글랜드와의 뚜렷한 차이점이었습니다.
참여와 갈등, 그리고 몰락
WIC는 무역과 전쟁을 위해 조직된 회사였습니다. 식민지 개척은 소홀히 다뤄졌고 큰 자금이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1629년부터 민간 투자자들이 맨해튼 바깥에 파트론십(영지)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을 때도, 인디언에게서 땅을 사 정착민에게 분양하는 제도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에서 이주하려는 열기는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1640년 회사가 모피 무역 독점권을 폐지하고 정착을 자유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게다가 당시 공화국 경제가 침체기를 겪으면서 아메리카행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식민지가 곧바로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았는데, 주된 원인은 그 시기의 인디언 전쟁이었습니다. 인디언을 장애물로 여긴 총독 빌럼 키프트(Willem Kieft)는 그들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인디언 부족들이 연합하여 맞섰고, 피비린내 나는 충돌이 수년간 이어졌습니다. 인디언을 무역 파트너로 우호적으로 유지하고 싶었던 정착민들은 키프트의 방식을 지지하지 않았고, 더 큰 발언권을 요구했습니다.
키프트의 전제적 통치 이후 1647년부터 질서 회복에 착수한 총독 페터르 스타이베산트(Peter Stuyvesant) 시대에 이해관계의 충돌은 한층 커져 폭발했습니다. 이 문제는 1652년 네덜란드 의회에서 다뤄졌고, 처음에는 스타이베산트가 해임되었지만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면서 철회되었습니다. 양국 관계는 계속 불안정하게 이어졌고, 결국 뉴네덜란드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중 이 식민지는 수리남과 맞바꾸어 영국에 넘어갔습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언어, 제도, 교회에서 이 지역이 네덜란드에 의해 개척되었다는 흔적이 남았지만, 뉴암스테르담과 그 배후지는 이제 '뉴욕'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