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라인강에 가라앉은 로마의 보물: 275년 게르만족 대약탈의 비밀

서기 275년, 라인강을 넘어온 게르만족의 대약탈

서기 275년, 약탈을 일삼던 게르만 무리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로마 제국 영내를 가로질러 프랑스 남부까지 진출했습니다. 이들의 유린 속에서 빌라와 신전, 심지어 도시 통째로 파괴되었고, 그들은 수백 파운드에 달하는 전리품을 챙겨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라인강을 다시 건너려던 순간 일부는 저지당했습니다. 배가 물을 새면서 보물들은 강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생각보다 평화롭지 않았던 로마 제국

로마 제국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15년 북부 갈리아가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에 편입된 이후 긴 평화의 시대가 열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평화는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반란이 일어났는데,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69~70년의 바타비족 반란입니다. 외부 세력이 국경을 넘어 대규모 약탈을 벌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해안조차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170년경에는 작센과 헤센 지방 출신 게르만 부족인 카티족(Chatten)이 북해를 거쳐 이 지역까지 침공할 수 있었습니다.

3세기는 로마에게 완전히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국경 곳곳에서 이민족들이 번영의 몫을 노리고 기웃거렸을 뿐 아니라, 제국 내부 역시 위기에서 위기로 내몰렸습니다. 3세기 동안 병으로 자연사한 황제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 단 한 사람뿐이었으며, 그 뒤를 이은 황제들은 전장에서 죽거나 그저 살해당했습니다.

재건되지 못한 네이메헌

이러한 혼란은 라인강 맞은편에 있던 게르만족들에게 뜻밖의 기회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사치와 번영을 탐내는 시선을 던져왔지만, 라인 변경에 주둔한 로마 군대 앞에서는 발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게르만족은 자신들의 차례라고 여겼습니다. 주로 젊은 남성들로 이루어진 여러 무리가 초소를 몰래 빠져나갔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저항 없이 마음껏 활동했지만, 다른 경우에는 로마군과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더(재위 222~235)는 수많은 약탈자들을 격퇴해 게르마니아 깊숙이까지 몰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군대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결국 이 원정은 게르만족에게도 무의미한 종막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세베루스 알렉산더가 암살되면서 로마 제국의 고난은 본격화되었습니다. 폭동과 본격적인 내전이 잇달았습니다. 235년부터 285년까지 로마에서는 군 사령관들이 줄지어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그럴 때마다 경쟁 후보나 현직 황제와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관심은 오직 권력 장악과 유지에만 쏠렸지 국정 운영에는 거의 향하지 않았습니다.

국경 방비 역시 소홀해졌습니다. 어떤 병사들은 황제 후보를 돕기 위해 소환되었고, 어떤 병사들은 제대 후에도 대체 인원 없이 빈자리로 남았으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군기와 성실성이 뒷전이 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은 이 상황을 흡족하게 지켜봤습니다. 240년부터 250년 사이 프랑크족 부족들이 쾰른 북쪽에서 라인강을 건너 부를 찾아 넘어왔습니다. 특히 로마령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이 크게 시달렸습니다. 이후 10년간 더 많은 습격과 약탈이 이어졌습니다. 259년에는 유투잉겐족(다뉴브 지역의 게르만 부족)이 북부 이탈리아로 쏟아져 들어왔고, 알레만니족은 갈리아 남부를 약탈했으며, 프랑크족은 계속해서 갈리아 북부를 유린했습니다.

그들의 약탈이 정점에 달한 것이 275년이었습니다. 라인강은 사실상 개방된 상태나 다름었습니다. 게르만족이 대거 강을 건너 아키텐까지 이르는 거의 모든 갈리아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약탈자들은 제국 안에서 온종일 겨울을 보냈습니다. 곳곳에서 값지면서도 무겁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훔쳤습니다. 특히 금·은·청동으로 만든 보석류와 사치품을 선호했습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수많은 취락과 신전, 빌라, 심지어 도시 전체가 불태워졌습니다. 트리어, 랭스, 메스, 파리 등 60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옛 네이메헌도 같은 운명을 피하지 못해 이후 거의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게르만 약탈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이듬해인 276년 봄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레는 전리품으로 산처럼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약탈자들은 신전의 은제 유물들을 반으로 부수며 분배하기도 했습니다. 신들의 형상이나 예술적 가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은 그 자체만이 목적이었던 셈입니다.

700킬로그램이 넘는 가라앉은 보물

본(Bonn)의 라인 주립박물관(Rheinisches Landesmuseum)에서 열린 특별전 '데르 바르바렌샤츠(Der Barbarenschatz. Geraubt und im Rhein versunken) — 약탈당해 라인강에 가라앉은 야만인의 보물'은 바로 이 격동의 시기를 조명합니다. 이번 전시는 지난 40년간 라인강에서 이루어진 특별한 고고학적 발견들을 바탕으로 하며, 정교한 복원 작업을 거친 유물들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됩니다.

여러 로마 보물들은 준설 작업 중 세상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연구 결과, 가장 중요한 보물들은 대체로 서기 275년경, 즉 약탈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모든 정황은 게르만족이 아키텐에서 게르마니아로 철수하는 동안 거의 방해받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저항을 만난 것은 라인강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애국심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게르만족의 전리품을 가로채기 위해, 로마 병사들은 귀환하는 무리들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취약했던 순간은 바로 라인강을 건널 때였습니다. 짐으로 과적된 배나 뗏목으로는 로마군의 민첩한 노젓는 배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충돌 후 게르만족은 죽거나 노예로 팔렸습니다. 배가 침몰해 전리품이 라인강 바닥에 가라앉은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로마군이 회수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물이 너무 깊거나 너무 어둡거나 물살이 너무 거칠어 손을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물은 수백 년간 강바닥에 잠들어 잊혀졌습니다.

유물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세기에 들어서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1980년경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슈파이어 근교의 노이포츠(Neupotz)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잠수부들은 은, 청동, 놋쇠, 주석, 철로 만된 천여 점의 유물을 발굴해냈고, 그 총 무게는 700kg을 넘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대한 게르만족의 약탈을 입증하는 더 강력한 증거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격동의 3세기에 대한 기록을 다시 쓰거나 적어도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름다운 유물이 많았기 때문에, 강바닥에 가라앉은 보물들은 로마 엘리트 계층의 부유했던 삶을 다시금 보여줍니다.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의 약탈에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를 짐작할 만합니다. 눈이 높아진 21세기의 박물관 관람객이라 할지라도 이 유물들을 마주하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