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세기에 걸친 미스터리,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다
스톤헨지(Stonehenge)의 의미를 두고 수백 년간 논쟁이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전망입니다. 최근에는 영국 고고학자 두 사람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스톤헨지가 선사시대의 순례지였다는 주장입니다.
거석 구조물로 보는 스톤헨지
학술적으로 스톤헨지는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거석 구조물(메갈리트)에 분류됩니다. 이는 모두 선사시대에 거대한 돌을 세워 만든 기념물을 가리킵니다. 가장 오래된 사례는 덴마크, 브르타뉴, 아일랜드, 포르투갈에서 발견되며, 기원전 4500년 직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네덜란드의 고인돌은 기원전 3400년경으로 연대가 측정됩니다.
스톤헨지는 그보다 훨씬 젊은 유적입니다. 공사가 착수된 것은 기원전 3100년경부터였습니다. 처음에는 격식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원형 해자와 방벽, 말뚝 고리, 중앙의 목조 건물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석재 구조물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500년경입니다.
그 전에 스톤헨지 사람들은 먼저 웨일스의 프레셀리 산맥으로 향했습니다. 암석에서 돌들을 떼어낸 뒤 고향으로 운반했습니다. 아마 배를 이용해 바다를 지나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약 400km에 달하는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스톤헨지에 도착한 돌들은 어수선한 반원형으로 나란히 세워졌습니다. 보통 웨일스산 이 돌들을 '블루스톤(bluestone)'이라고 부릅니다.
1세기쯤 지난 후 블루스톤은 서 있는 사암들의 원형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작업자들은 이 위에 눕힌 돌을 얹어 돌들이 서로 연결된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원 안쪽에는 두 번째 돌 그룹을 말굽 모양으로 배치했고, 여기에도 눕힌 돌을 하나 얹었습니다.
블루스톤은 말굽 양옆에 원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나중에 건설자들은 다시 생각을 바꿔 안쪽 블루스톤들 역시 말굽 모양으로 세웠습니다.
마법사 멀린의 전설
고고학자들은 스톤헨지가 왜 세워졌는지 여전히 추측할 뿐입니다. 기념물이 여러 차례 개조된 이유 또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있습니다. 유적의 축이 6월 21일(하지) 태양이 떠오르는 지평선상의 지점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찰만으로 스톤헨지의 용도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일출을 예측하는 데 굳이 이렇게 거대한 기념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드렌터주의 일부 고인돌처럼 스톤헨지 역시 당시 공동체의 중심점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종교적 중심지 혹은 일종의 신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명도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 단순한 구조물로도 충분히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사람들은 흥미로운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한 전설에 따르면 아서 왕의 병사 다수가 전투 끝에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마법사 멀린은 아일랜드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상처를 치유하는 큰 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멀린은 마법의 힘으로 돌들을 들어 올려 허공을 날아 옮긴 뒤 스톤헨지에 내려놓았습니다. 아서 왕은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에 대었고, 병사들은 즉시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명백히 꾸며낸 이야기지만, 이 전설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서기 18세기까지 현지 주민들은 스톤헨지의 돌 조각을 부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치유의 돌, 블루스톤
지난 2세기 동안 고고학자들은 스톤헨지를 여러 차례 다시 조사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봄에 고고학자 팀 다빌(Tim Darvill)과 제프리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가 원래의 블루스톤 원형을 재검토했습니다. 두 사람은 스톤헨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이 돌들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웨일스까지 가서 가져올 만큼 이 돌들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그리고 아마 큰 고통과 노력이 따랐을 텐데, 왜 여러 번 옮길 필요가 있었을까요?
기념물 주변에서 다빌과 웨인라이트는 인골 무더기를 발견했습니다. 상당수가 변형된 뼈였는데, 그 비율은 일반 인구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보건대 질병이나 신체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주로 이곳에 묻혔던 모양입니다.
치아의 화학 분석 덕분에 환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현지 주민만이 아니라 웨일스, 레이크 디스트릭트, 아일랜드 등 의외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온 방문자들이었습니다. 다빌과 웨인라이트는 여기서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스톤헨지는 순례지였다는 것입니다. 병자들이 치유를 위해 사방에서 몰려든, 선사시대의 루르드(Lourdes)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웨일스산 블루스톤이 있었던 이유도 설명됩니다. 그 암석을 쪼개면 푸른빛이 도는 것은 물론, 수백 개의 별이 반짝이는 듯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아마 이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약용' 돌이나 광물을 사서 피부에 지니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블루스톤에 치유력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스톤헨지 건설자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돌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몇 해 전 두 고고학자는 블루스톤의 출처인 프레셀리 산맥을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순례지 가설을 뒷받침하는 듯합니다. 채석장은 샘이 솟아나는 곳에 있었고, 이런 샘은 전통적으로 '성스러운 우물(holy well)'이라 불립니다. 물이 흘러나오는 암석의 은혜로운 힘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약효가 있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우물 주변에서 다빌과 웨인라이트는 여러 고인돌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경우 하나 이상의 블루스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두 고고학자에 따르면 이 돌들은 샘의 치유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으며, 훗날 스톤헨지가 더욱 강력한 순례지로 확장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왜 하필 스톤헨지인가?
그러나 다빌과 웨인라이트의 주장으로 스톤헨지 논쟁에 마침표가 찍힌 것은 아닙니다. 당장 모든 고고학자가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에 따르면 근거가 아직 너무 빈약하고 설명 역시 지나치게 추측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다빌과 웨인라이트가 발굴한 유골이 모두 순례자의 것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톤헨지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던 평범한 이주민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사시대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이주했습니다.
다빌과 웨인라이트가 풀지 못한 또 다른 질문도 있습니다. 블루스톤이 실제로 치유 순례지를 짓기 위한 것이었다면, 왜 하필 이 부지였을까요? 다른 거석 유적 안이나 근처가 아니라? 이 지역에는 그런 기념물이 가득하므로, 스톤헨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다빌과 웨인라이트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과감하게 목숨을 걸었습니다. 과학은 답을 내놓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일이며, 그 공로는 그들에게 돌아갑니다. 게다가 그들의 이론은 스톤헨지 같은 기념물이 주로 중요하거나 공이 있는 인물의 능묘 역할을 했다는 전통적 설명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다빌과 웨인라이트는 더 멀리 내다보았고, 그렇게 스톤헨지를 둘러싼 논쟁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