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해안에서 해안까지 이어진 로마의 잊힌 국경, 안토니누스 성벽

하드리아누스 성벽(Hadrian's Wall)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유적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중국 만리장성이나 베를린 장벽의 로마판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그로부터 약 120킬로미터 북쪽, 국경을 넘어 스코틀랜드에 로마 황제가 또 다른 성벽을 세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영국 뉴캐슬 근처에 가면 잉글리시 헤리티지(English Heritage) 표지판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옵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지나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이 성벽은 영국의 중요한 관광 명소가 되었죠. 그렇다면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의 성벽은 왜 이토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언론 보도 부족 탓일까요, 아니면 문화재 관리의 실패일까요? 지금부터 과거에 활발히 운영되던 이 성벽을 찾아 떠난 탐험기를 소개합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

안토니누스의 성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하드리아누스 성벽과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황제 하드리아누스(재위 기원후 117~138년) 시대에 로마 제국은 최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정치 통치에 있어 현실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계속 팽창하면 더 이상 통치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죠. 따라서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영토 확장보다 국경 강화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특히 브리타니아에서 로마 제국의 북방 국경은 때때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인접한 야만 부족들이 자주 로마 영토를 침입했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하드리아누스는 칼레도니아(Caledonia)의 적대 부족들을 멀리 몰아낼 수 있었고, 로마 시민들이 북부의 오랑캐들과 함부로 접촉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서기 122년, 하드리아누스는 '발룸 하드리아니(vallum Hadriani)'라 불리는 성벽 건설을 명했고, 공사에는 6년이 걸렸습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구조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요새 체계였습니다. 남쪽에서 보면 흙벽과 해자(도랑)가 먼저 나타나고, 그 뒤에 또 다른 벽이 이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군대가 어디서든 성벽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로가 관통하는 개활지가 펼쳐졌고, 그 뒤에 실제 성벽이 위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벽 앞(스코틀랜드인 입장에서)에는 뾰족한 말뚝을 박은 깊은 해자가 있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길이는 로마 마일 80마일, 즉 약 117킬로미터로 솔웨이 만(Solway Firth)에서 타인강(River Tyne)까지 이어졌습니다. 성벽의 높이와 폭은 지역과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에 따라 달랐습니다. 예컨대 어딩강(River Irthing) 동쪽에서는 정방형 석재 블록으로 성벽을 쌓아 두께 약 3미터, 높이 5~6미터에 달했습니다. 반면 어딩강 서쪽에서는 주로 잔디 흙벽으로 축조되어 두께 약 6미터, 높이 3미터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성벽과 해자를 제외한 수치입니다. 북쪽에서 온 스코틀랜드 무리들에게 이런 구조물이 얼마나 위압적으로 느껴졌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토니누스의 성벽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규모와 성격을 알고 나면, 약 20년 후 후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120킬로미터나 북쪽에 또 다른 성벽을 세운 것이 거의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대체 왜였을까요? 픽트족과 스코트족이 로마 제국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이중 보험을 만든 것일까요? 아니면 하드리아누스와 달리 안토니누스에게 확장 욕구가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국경을 120킬로미터 북쪽으로 옮기고 싶었던 걸까요?

안토니누스의 진짜 의도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그럴듯한 여러 가설이 존재합니다. 글래스고 대학교의 윌리엄 S. 핸슨(William S. Hanson) 교수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스코틀랜드 부족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통제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설명은 안토니누스가 로마 제국 내부에 자신의 위상을 각인시키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입양 황제였기에 황제 계승자로서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은 아니었고, 아직 군에서 두각을 나타낸 바도 없었습니다. 성벽을 건설함으로써 제국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픽트족의 위험한 영역에 다시 한번 발을 들여놓으며 용기까지 보여주려 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성벽은 적대 부족들에게 위압감을 주거나, 그들의 남방과의 교역을 통제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서기 142년, 안토니누스는 성벽 건설에 승인을 내렸고, 공사는 12년 만에 완료되었습니다. 완공 당시 성벽의 길이는 약 39마일로, 서쪽 클라이드 만(Firth of Clyde)의 올드 킬패트릭(Old Kilpatrick)에서 동쪽 포스 만(Firth of Forth)의 팔커크 근처 보네스(Bo'ness)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안토니누스 성벽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대신해 로마 제국의 새로운 국경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안토니누스 성벽의 축조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지역에서 개척 작업을 한다면 성벽 재료로는 돌이 가장 좋겠죠? 튼튼해야 하고, 가능하면 세월의 시련도 견뎌야 하니까요. 황제 입장에서도 후손들이 자신의 건축물에 감탄하며 이름을 기억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성벽에서 돌은 기초(기단)로만 사용되었습니다. 대부분은 높이 3~4미터의 잔디 흙벽이었죠. 그 이유 역시 명확하지 않습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황제 안토니누스에게 성벽 전체를 돌로 짓기에는 돈과 인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벽 앞에는 튼튼한 성책(램파트)이 세워졌고 깊은 해자가 파였습니다. 성벽을 따라 약 3킬로미터 간격으로 요새가 세워졌으며, 이들은 도로로 연결되었습니다.

철수

안토니누스 성벽은 유감스럽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서기 162년, 즉 건설된 지 불과 20년 만에 로마군은 하드리아누스 성벽 뒤로 물러났고, 그 성벽이 다시 로마 제국의 국경이 되었습니다.

서기 208년,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가 스코틀랜드에 상륙했습니다. 그는 야만족들을 다시 안토니누스 성벽 너머로 밀어내려 했습니다. 이 짧은 재점령 기간 동안 세베루스의 병사들은 성벽 일부를 수리하기도 했죠.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세베루스 역시 병력을 철수시키고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국경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왜 실패했는가?

안토니누스 성벽이 로마 제국의 최종 국경으로 자리 잡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새들이 야만족과의 교역을 묵인했기 때문에 국경으로서 무용지물이었다는 전문가도 있고, (그곳에 주둔한 로마 병사 다수가 현지 출신이었던 점도 한몫했다며) 로마 병사들이 픽트 부족과 융합되었다는 학자도 있습니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안토니누스의 국고가 비어 있어 그 지역에서 일하는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보다 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안토니누스 성벽을 둘러싼 과거의 역사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건설되고, 방어되고, 버려지고, 복원되고, 다시 방어되고, 다시 버려진 성벽이었죠. 오늘날 대중에게 낯선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스코틀랜드는 문화유산을 상업화하고 관리할 재정이 잉글랜드보다 적습니다. 게다가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유적이 경관 속에서 더 눈에 띕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안토니누스 성벽의 기초를 여전히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한 시간 반짜리 도보 여행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지만요.

더 보기

  • 알라르드 피어슨 박물관(Allard Pierson Museum)의 하드리아누스 성벽 사진 전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