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중세 시대의 노르트홀란트와 자위트홀란트 지역에서는 고대 네덜란드어와 고대 프리지아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의 문자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지명이라는 귀중한 단서가 있습니다. 역사언어학은 이러한 지명들을 통해 한 조각의 문화사를 복원해 줍니다.
시간을 서기 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길쭉한 배 하나가 라인 강 하구로 들어섭니다. 몇 킬로미터 상류의 높은 모래 언덕에 배를 정박시키고, 무리의 남녀가 내립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황금 버클이 달린 붉은 망토를 두르고 은으로 장식된 검을 허리에 차고 있습니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핍니다. 마음에 듭니다. 사구 지대의 울창한 숲은 건축 재목이 되고, 사방의 물줄기에는 분명히 물고기가 풍부할 것입니다. 게다가 바다와 가까워 무역과 원정에도 유리합니다. 지도자는 동료들에게 손짓합니다. 여기에 마을을 세우기로 합니다.
이 지도자의 이름은 오수헤이르(Oosugeer)로, 그의 언어로 '신의 창'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가 라인 강변의 모래 언덕 위에 세운 정착지는 후손들에 의해 '오수헤이르의 성역'이라 불리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 정착지와 초기 중세의 이름은 21세기인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다만 언어의 변화를 거치면서 6세기의 '오수헤이르의 성역'은 오늘날의 우흐스트헤이스트(Oegstgeest)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초기 중세의 우흐스트헤이스트
고고학 발굴 조사에 따르면 현재의 우흐스트헤이스트 인근에는 초기 중세 시대의 정착지가 존재했습니다. 이 정착지는 약 8헥타르 규모로, 남쪽 가장자리가 라인 강 북안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기원후 500년에서 1000년 사이, 즉 초기 중세 시대에 우흐스트헤이스트에 살았던 사람들은 잉글랜드 및 덴마크와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토기의 양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연안 지역의 토기들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북해를 건너는 무역 덕분에 초기 중세의 우흐스트헤이스트 주민들은 부유하고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2013년 우흐스트헤이스트에서 발굴된 도금된 은 그릇이 바로 그 번영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그릇은 7세기 어느 시점에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로 물줄기 속에 놓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해 게르만어
초기 중세의 우흐스트헤이스트를 알려주는 것은 고고학만이 아닙니다. 언어학 역시 네덜란드 연안 주민들이 잉글랜드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당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연안 지역에서는 사실상 같은 언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언어가 바로 훗날의 영어와 프리지아어의 조상입니다. 언어학자들은 이를 '북해 게르만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6세기 초의 우리의 오수헤이르도 북해 게르만어를 사용했을 것이며, 이 언어는 이후 중세 영어(고대 영어)와 중세 프리지아어(고대 프리지아어)로 갈라져 나갔습니다.
영어와 프리지아어의 인연
영어와 프리지아어의 관계는 오늘날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현대 프리지아어에는 네덜란드어와 비슷한 요소가 많은데, 이는 프리지아어가 수세기 동안 네덜란드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두 언어의 옛 인연은 어휘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영어 cheese와 프리지아어 tsiis는 매우 닮은 반면 네덜란드어는 kaas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어 goose와 프리지아어 goes도 흡사하지만 네덜란드어의 gans는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영어와 프리지아어가 네덜란드어와는 다른 공통의 음운 변화를 함께 겪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언어학자들은 이 공통 음운 변화를 서기 500년 직전의 시기로 추정하며, 그때 영국인과 프리지아인의 조상들은 독일 북부와 덴마크 지역에 함께 살았습니다.
우흐스트헤이스트를 세운 오수헤이르는 아마도 6세기에 독일 북부에서 네덜란드 연안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의 후손들은 분명 자신들을 프리지아인이라 불렀고, 초기 형태의 고대 프리지아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늦게 도착한 네덜란드어
그런데 오늘날 우흐스트헤이스트에서는 네덜란드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덜란드어는 나중에야 이곳에 들어온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초기 중세 네덜란드어, 곧 고대 네덜란드어의 사용자들은 주로 벨기에와 노르트브라반트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기에 이들은 북부 프랑스부터 독일 라인란트까지 뻗어 나가는 소위 프랑크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프랑크족은 7세기 후반 북쪽으로 팽창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고, 그 때문에 네덜란드 연안의 프리지아인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또한 프랑크족은 프리지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조상 대대로 믿어 온 종교를 버리기를 바랐습니다. 8세기 초, 프랑크족은 마침내 프리지아인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프랑크족은 네덜란드 강 유역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프랑크 귀족들이 프리지아인들 사이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의 교체
네덜란드 연안 지역에서의 프랑크족의 영향력은 이후 수세기(800~1000년경)에 걸쳐 중대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프랑크족의 언어인 고대 네덜란드어는 9세기부터 네덜란드 연안 지역의 지위 언어, 즉 권위 있는 언어로 부상했습니다. 그 결과 프리지아인 상인들과 귀족들은 고대 프리지아어를 버리고 고대 네덜란드어로 갈아타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프리지아식 지명과 수명(水名)은 언어가 바뀌었음에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단어들과 형태가 달랐기 때문에, 이 이름들은 저마다 프리지아적 기원을 드러냅니다. 초기 중세 프리지아인들은 네덜란드어 koog 대신 kaag라고 불렀고(라이덴 동쪽의 카허플라선 Kagerplassen이 그 예입니다), 네덜란드어 zoet 대신 swet라고 불렀던 것처럼요.
프리지아계 지명인 우흐스트헤이스트 역시 그렇게 보존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명의 첫 부분인 oegst-는 인명 오수헤이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게르만어 합성어 *ansu-(이교의 신) + *gair(창)에서 온 프리지아어 형태입니다. 흥미롭게도 같은 이름은 영어 인명 오스카(Oscar)와 스칸디나비아 인명 안스가르(Ansgar)에도 남아 있습니다. 프리지아인들이 네덜란드어 gans 대신 goes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는 안스트헤이스트(Anstgeest)가 아니라 우흐스트헤이스트(Oegstgeest)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불멸의 이름
고대 프리지아어에서 고대 네덜란드어로의 언어 교체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오수헤이르의 정착지에 관한 최초의 문자 기록도 발견합니다. 서기 870년경 한 필사관은 Ôsgêresgêst의 두 농장이 위트레흐트의 성 마르티누스 교회 소유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오수헤이르가 네덜란드 연안에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나 노래가 실제로 전해졌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우흐스트헤이스트 건설의 구체적인 과정 또한 언제나 추측의 영역에 머물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건설자의 이름은 후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우흐스트헤이스트라는 지명 속에 석화되어, 오수헤이르는 이제 불멸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