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초 시리아 국민들이 아사드 대통령 정권에 맞서 봉기한 이후 폭력은 급속히 격화되었습니다. 누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이 갈등은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리아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함께 시리아 지역의 비교적 평온했던 긴 시절도 막을 내렸습니다. 중동의 구 오스만 영토는 전쟁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연필과 자로 지도 위에서 분할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 식민 협상가들이 그은 선은 오늘날까지도 시리아와 이라크의 인위적인 국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을 '물리친' 뒤 스스로를 강대국이라 여긴 프랑스는 처음부터 새로운 식민지를 강경하게 통치했습니다. 또 하나의 외세 통치자로 등장한 그들은 순식간에 주민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낭만적 민족주의의 물결을 타고 아랍 세계에서도 아랍 민족의 자결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 아랍 민족주의는 초기에는 소수의 지식인 상류층에게서 주로 지지를 받았지만, 프랑스의 억압 아래 시리아 아랍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는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분할 통치
프랑스의 분할 통치 정책은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오랜 분열, 그리고 수 세기 동안 소수 시아파 집단으로 억압받아온 알라위파의 처지를 교묘히 활용했습니다. 알라위파는 시아파 이슬람 안에서도 독특한 신념과 관행을 지닌 무슬림들로, 오늘날 시리아 인구의 약 12%를 차지합니다. 알라위파는 아랍인이지만 아랍 민족주의 사상에는 별로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 운동의 주축은 수니파였습니다.
민족주의를 최대한 억누르기 위해 프랑스는 위임통치령을 인종·종교 집단별 준자치 지역으로 나누었습니다. 민족주의 성향이 덜하고 친프랑스적이었던 알라위파와 레바논에는 별도의 국가가 주어졌습니다. 한편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에 따라 다마스쿠스국과 알레포국은 1925년 시리아국으로 통합되었습니다.
1927년에는 민족주의에 고취된 대규모 봉기가 프랑스 통치에 맞서 일어났습니다. 위임통치령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는 고립된 알라위파 사이에 있던 감정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알라위파 남성들을 모집해 무장시키고 보안군과 비밀경찰 요원으로 삼았습니다. 알라위파 민병대의 도움으로 프랑스는 결국 봉기를 엄청난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랑스의 권력을 물려받은 알라위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마침내 시리아를 떠날 때, 알라위파는 이미 특권적인 권력 지위를 쌓아 올린 상태였습니다. 식민 지배 기구의 일원으로서 그들은 평균보다 부유했고, 충실한 훈련을 받았으며, 무장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세기의 외세 통치로 자치 경험이 없었던 시리아는 1960년대까지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았고, 국가는 군부와 보안기관, 그중에서도 알라위파가 많은 세력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습니다. 1946년 독립 후 첫 10년 동안 무려 20개의 내각이 들어섰다 무너졌고, 네 개의 서로 다른 헌법이 만들어졌습니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시리아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이 키워가는 세력에 맞서기 위해 소련에 가까워졌습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시기에 모든 아랍인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범아랍주의 사상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게 됩니다. 이는 온건한 사회주의와 함께 1947년 창당된 바트당의 핵심 원칙 중 하나였습니다. 바트당 초창기 멤버 중 한 명이 바로 알라위파 출신 하페즈 알아사드였습니다.
아사드는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고, 이후 모스크바에서 장교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국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고, 범아랍주의 정신에 따라 거대한 시리아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결심했던 아사드는 1966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1967년 6일 전쟁에서 시리아(그리고 이집트)가 증오하던 이스라엘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목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옥한 시리아 골란고원을 포함한 여러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1970년, 아사드가 이끄는 시리아군은 또 다른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실패와 불안정의 연속인 정치에 지친 국민들은 수니파, 시아파, 기독교인, 알라위파를 막론하고 상당수가 아사드를 '강력한 지도자'로 환영했습니다. 그는 프랑스로부터 물려받은 알라위파의 권력을 군과 보안기구 안에서 더욱 공고히 다졌습니다.
하마 학살
몇 년 안에 아사드는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의 지원을 등에 업고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는 시리아 행정을 철저히 세속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이는 이슬람주의 사상이 정부나 사법부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였을 뿐 아니라, 수니파 무슬림 형제단 같은 이슬람 단체의 반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이내 수니파의 저항이 아사드의 세속적 알라위파 독재에 대한 반발로 불붙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봉기, 테러, 시위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공격의 배후에 있던 무슬림 형제단의 거점 중 하나가 하마시였습니다. 1982년 2월, 아사드의 동생 리파트 알아사드가 이끄는 시리아군은 그 도시의 봉기를 피로 물들인 채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총살당했고, 도시는 포격과 불도저로 일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봉기는 멈췄지만, 무슬림 형제단은 복수를 맹세했습니다.
미국이 지배하는 중동에 대한 필수적인 균형추로서 안정된 시리아를 중요하게 여긴 소련과 이란의 지원 덕분이기도 했지만, 아사드는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그의 독재와 시리아 수니파 다수에 대한 억압은 2000년, 아사드가 사망하는 해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불씨만 남은 화약고
하페즈의 차남 바샤르 알아사드(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장남 바셀 알아사드는 1994년 원인 불명의 교통사고로 사망)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독재가 완화될 것이란 희망이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유학한 안과 의사였던 바샤르는 온건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대통령 취임 후 첫 연설에서 그는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화해를 언급했습니다. 바샤르 본인도 수니파 여성과 결혼했으며, 시리아 내부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바샤르의 야망이 진심이었을지 모르나, 개혁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새 대통령은 권위주의 체계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는 경제 자유화를 단행했지만, 이러한 개혁은 주로 프랑스 철수 이후 실권을 쥐어온 알라위파 엘리트에게 혜택을 돌렸습니다.
개혁을 간절히 바라던 억압받던 수니파 다수는 이내 환멸을 느끼며 방관자로 전락했습니다. 빈곤과 불평등은 급속히 심화되었습니다. 2005년부터 시작된 극심한 가뭄은 수백만 명의 가난한 농촌 주민들을 일자리와 더 나은 삶을 바라며 도시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이 젊은 수니파 남성이었던 새로운 도시 거주민들은 경제의 거의 전부가 정권 주변의 시아파 알라위파 손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도시에서 발판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가뭄, 수 세기의 외세 지배, 하마 학살의 참혹한 기억, 그리고 개혁에 대한 좌절된 희망은 2010년 시리아 도시들을 화약고로 변모시켰습니다. 불씨 하나면 충분히 폭발할 상황이었습니다. 그 불씨는 2011년 초에 떨어졌습니다. 아랍 세계 곳곳에서 억압받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정권의 붕괴를 요구했습니다. 특히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외세 개입은 시리아 분쟁을 지역 전체로 번지는 그림자 전쟁으로 만들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나온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여전히 뚜렷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