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1943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1943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1942년 8월부터 1943년 1월까지 독일군과 소련군이 맞붙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20세기 군사사에서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 중 하나로 기록된 이 전투는 양측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한 거대 혈전 끝에 소련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으며, 소련 영토 내 독일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추축국에는 치명적 타격이었고, 연합국에는 소중한 심리적 승리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서막

1941년 6월 22일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과 독일군의 초기 승리 이후, 전선은 1941년 12월 안정화되었다. 1942년 봄, 독일군은 전년 겨울의 참혹한 전투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시간이 자신들에게 불리함을 안 히틀러는 소련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여름 공세를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그 목적은 오래된 집착이었던 캅카스 유전(마이코프, 그로즈니, 바쿠)을 장악하거나 무력화하여 소련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청색 계획(Fall Blau)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남부 집단군에만 공세 임무를 부여했으며, 지금까지 독일군이 성공해온 전술—전차와 전술 항공이 길을 열고 후방을 초토화하며 적의 보급과 지휘소를 파괴하면 보병이 포위망을 소탕하는 방식—을 따랐다. 선택된 전장은 도네츠에서 볼가까지 이어지는 남러시아의 초원과 평야로, 독일 기계화 부대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이상적인 지형이었다.

청색 계획은 여러 단계로 시행될 예정이었다:

  • A단계: 만슈타인의 제11군이 크림반도를 정리하고, 제6군과 제1기갑군이 이쥼 돌출부를 해소하는 두 가지 예비 작전.
  • I단계: 쿠르스크와 벨고로드에서 두 개의 집게발로 보로네즈 일대 돈 강의 소련군을 포위.
  • II단계: 도네츠와 돈 강 사이 밀레로보 지역에서 소련군을 다시 포위한 뒤, 돈 강을 따라 남진.
  • III단계: 3개 군이 볼가 강 동쪽으로 급진격해 스탈린그라드 인근에서 II단계 부대와 합류. 계획에는 "어떤 경우든 스탈린그라드에 도달하거나, 최소한 중포 사정권에 두어 군수·통신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마비시켜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점령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볼가 강 수송을 차단하고 IV단계 부대의 북쪽 측면을 엄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 B단계: 앞의 세 단계를 완료해 남러시아의 붉은 군대 주력을 궤멸시킨 후, 독일군이 캅카스로 진격. A 집단군(남부 집단군에서 분할)이 바쿠까지 1,000km 이상을 기동 타격하고, B 집단군이 돈 강과 볼가 강을 따라 북쪽 측면을 지키는 임무를 맡는다. 스탈린그라드 구역은 제6군이 담당.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1943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제6군은 독일 육군(Heer)에서도 최정예 부대였다. 1942년 9월이면 독일군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자랑했다. 4개 군단에 보병·경보병(예거) 사단 11개, 기계화 사단 2개, 기갑 사단 2개(타 사단 병력 일부 포함), 다연장 로켓포를 포함한 약 1,000문의 포병을 보유했다.

지휘관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 1890년 헤센 태생으로 하급 공무원 집안 출신인 그는 1910년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 내내 참모 부서에서 복무했다. 루마니아 귀족 여성과 결혼하며 상류층 인맥을 얻었고, 히틀러 집권과 독일 재무장 덕에 승승장구했다. 1935년 구데리안을 이어 기계화 병과 참모장, 1939년 장군 진급 후 제6군 참모장으로 1940년 벨기에군 항복을 접수했다. 프랑스 전역 후 육군 총무감(Quartermaster General)에 올라 바르바로사 작전의 핵심 두뇌로 활약했고, 1942년 1월 5일 제6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여단급 부대 지휘 경험이 없던 그가 육군의 자존심인 제6군을 맡게 된 것이다.

청색 계획의 좌절

1942년 6월 28일 청색 계획이 개시되었다. 독일군에 주어진 시간은 캅카스 유전을 점령할 4개월. 맞선 소련군도 강력했지만,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면 부대를 우선시하며 독일의 캅카스 진격을 양동 작전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청색 계획의 앞선 세 단계는 독일군에게 상대적 성공을 안겨주었다.

7월 25일경 독일군은 캅카스 관문인 로스토프를 장악했고, 스탈린그라드까지 100km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독일의 승리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1941년의 국방군이 아니었던 국방군은 만성적인 병력 부족과 보급난에 시달렸고, 소련군은 1941년과 달리 독일의 포위망을 피해 달아나며 시가전에서 국방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전황이 전개되고 독일 장군들이 주저하자 히틀러는 작전 지휘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청색 계획의 근간을 흔들었다.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전략적 직관은 뛰어났지만, 군사 아마추어였던 그는 점차 현실 감각을 잃어갔다.

1942년 7월 말이면 독일군이 캅카스 정복과 북쪽 측면(돈·볼가 강선) 엄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공세 중단을 거부한 히틀러는 B 집단군 전력을 떼어 A 집단군에 보태기로 결정했다. 스탈린그라드 지역을 확보해야 할 제6군은 병력 감축에도 전선은 약 300km로 확대되었고, 연료 보급마저 줄어들어 진격이 늦어졌다.

동시에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주변에 방어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이 도시를 사수하면 캅카스로 진격한 독일군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음을 간파했다. 고정점을 만들어 붉은 군대가 반격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벌겠다는 계산이었다. 7월 12일 형성된 스탈린그라드 전선은 8일 만에 18만 7천 명, 포 7,900문, 전차 360대를 집결시켰다. 시가지 방어의 핵심은 곧 바실리 추이코프가 지휘하는 제62군에게 맡겨졌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1943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농민 출신으로 7형제 모두 군인이었던 추이코프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장군이었다. 여러 면에서 파울루스의 정반대였다. 직관적이고 대담하며, 독일군 상대를 괴롭히던 회의와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에게는 도시전 전문가이자 냉철한 크릴로프라는 뛰어난 참모장이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애초 부차적 목표였던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히틀러에게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캅카스 진격 부대의 승리가 불투명해지자, 적어도 볼가 강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소련 보급로의 요충지이자 거대 군수 공업 중심지인 이 도시만이라도 차지하려 했다. 군수·물류적 가치 외에도 심리·정치적 요인이 컸다. 제3제국 선전부는 승전을 갈구했고, 스탈린의 이름을 단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보다 더 빛나는 승리는 없었다.

스탈린 역시 도시의 중요성을 꿰뚫고 있었고, 수많은 병력을 희생시킬 각오였다. 제6군의 진격은 완강한 소련군의 저항, 보급난, 파울루스의 주저 속에 더디게 진행되었다. 루프트바페(특히 리히트호펜의 제4항공단)는 전력이 약화되었음에도 총력을 다했다. 8월 23일엔 도시 대부분을 초토화시켜 수만 명의 민간인 목숨을 앗아갔고, 폐허는 소련군에게 최적의 방어 지형이 되었다.

본격적인 시가전은 1942년 9월 13일 시작되었다. 주전장은 직선거리 10km 남짓한 좁은 전선에 집중되었다. 파울루스는 두 가지 핵심 목표를 설정했다:

  1. 마마예프 쿠르간: 고대 스키타이 무덤으로 해발 102m의 인공 언덕. 볼가 강과 북부 공장 지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
  2. 중앙 부두: 시가지 중심부(제62군, 제64군)의 증원과 보급이 이뤄지는 볼가 강의 주된 항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1943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평야 기동전에 익숙한 파울루스는 전혀 다른 전장에서 기존 전술을 고집했다. 초반 쏟아지는 포탄 세례에 소련군 저항이 무너지는 듯했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추이코프조차 한때 도시가 함락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폐허가 된 거리, 반파된 건물의 지하실과 층계에서 벌어진 육박전은 양상이 달랐다. 소련 병사는 놀라운 저항력을 보였다. 한 블록, 한 공장을 두고 대대 단위 부대가 며칠씩 혈투를 벌였고, 기차역 일대는 일주일 새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독일 전차는 지뢰, 급조폭발물, 대전차포에 취약했고, 양측 저격수들은 대담함을 겨뤘으며, 칼부림까지 빈번했다.

두 달간의 처절한 전투 끝에 파울루스는 도시의 90%를 장악했다. 11월 중순 추이코프의 제62군은 4만 7천 명과 전차 19대만 남은 채 셋으로 쪼개졌다. 중앙 부두와 마마예프 쿠르간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으나 방어 병력은 궤멸 직전이었고, 부상자는 치료 없이 죽어가며 탄약은 바닥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운명한 듯 보였다. 그러나 추이코프는 도시가 함락되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바로 11월 19일, 우라누스 작전이 개시되었기 때문이다.

우라누스 작전과 제6군 포위

우라누스 작전은 1942년 붉은 군대의 최대 반격 작전이었다. 9월 구상되어 치밀한 계획 하에 준비된 이 작전은, 독일 국방군의 대공세 못지않은 규모로 포병·전차·항공 전력을 대거 투입해 스탈린그라드 일대 독일군을 북쪽과 남쪽에서 이중 포위하는 것이었다.

작전 입안자 게오르기 주코프는 단 두 달 만에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약 100만 병력, 전차 900대, 포 1만 3,500문, 항공기 1,000대 이상을 작전 구역에 집결시키면서도 독일군 정보부를 철저히 속였다. 수많은 경고에도 독일 정보부는 소련의 대공세 성공을 믿지 않았다.

소련 주공이 향할 지점의 추축국 방어는 극도로 취약했다. 제6군은 히틀러 명령으로 여전히 시가전에 묶여 있었고, 그 양익은 방어력이 의심스러운 부대들이 맡고 있었다. 소련의 초기 타격은 독일군보다 장비도 열악하고 사기도 낮은 루마니아 사단들에 집중되었다. 이 부대들은 대전차 화력이 빈약한데도 광대한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시간 오전 7시 30분, 암호명 "사이렌"과 함께 루마니아 제3군(7개 사단)을 겨냥한 80분간의 포격 준비가 시작되었다. 오전 8시 50분, 세 개 소련군이 루마니아 진지를 강타했다. 선행 포격(100km 밖에서도 들렸다고 함)에 루마니아 전선은 와해되었고, 당일 2만 7천 명의 루마니아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 구원하러 온 독일 제22기갑사단 잔여 병력도 궤멸되었다. 불과 3일 뒤인 11월 23일, 소련군의 양쪽 집게발이 칼라치에서 만나 파울루스 군을 폭 60km 남짓한 포위망에 가뒀다. 포위된 병력은 루마니아군 9,500명을 포함해 26만 명, 전차 140대, 포 1,250문에 달했다.

파울루스 군은 여러 비행장을 사수해 공중 보급로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방어 외엔 아무 작전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연료가 바닥나 전차는 멈췄고 포탄은 부족했다. 후방과 보급 창고에서 단절된 제6군은 물자 면에서 완전히 고립되었고, 독자적 탈출 시도는 애초부터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다. 파울루스는 외부 구원이 올 때까지 버텨야만 했다.

독일 제6군의 최후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1943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히틀러는 포위된 부대의 저항력을 과신했다. 괴링이 공중 보급으로 제6군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장담했고, 구원 사령관으로 불려온 만슈타인 원수도 낙관했다. 전년 겨울 데먄스크 포위전에서 10만 독일군이 공중 보급으로 버틴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6군은 공중 보급에 의존해 버티고, 만슈타인이 구원 병력을 모으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공중 보급은 재앙이었다. 제6군 유지에 하루 350톤이 필요했지만, 루프트바페는 하루 평균 100톤 남짓에 그쳤다. 수송기 부족, 정비 불량, 좁은 비행장, 그리고 강력한 소련 방공망이 원인이었다.

포위망 안 사정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굶주림에 탄약까지 아껴야 했던 병사들은 혹한까지 견뎌야 했다. 동상과 질병이 부대를 잠식하는 사이 소련군은 점점 대담해져갔다.

만슈타인의 구원 작전 겨울폭풍 작전(Wintergewitter)도 순탄치 않았다. 제4기갑군이 포위망 남서쪽 소련군을 돌파하는 동시에 제6군이 기동 전력을 내보내 합류하되, 나머지 전선은 유지한다는 단순 무식한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포기를 거부하며 1943년 공세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고, 만슈타인은 제6군 철수를 주장했으나 "전장에서 히틀러를 설득하겠다"며 12월 12일 작전을 강행했다.

초반 기갑 부대는 순항했으나, 만슈타인은 곧 작전이 실패임을 직감했다. 12월 16일 소련의 토성 작전(Operation Saturn)이 만슈타인군 좌익을 강타해 그를 되레 포위할 위기에 빠뜨렸다. 이제 그의 목표는 제6군 구원이 아니라 자기 부대 탈출로 바뀌었다.

전쟁의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1943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

도시 점령 실패와 극한의 고통 속에 파울루스는 돌파를 알지도, 감히 시도하지도, 시도할 수도 없었다. 돌파가 가능했다 해도 히틀러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피로 얻은 스탈린그라드 진지를 포기해야만 했다. 군마까지 모두 잡아먹은 제6군 병사들은 이제 죽음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그들의 고통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독일군 부대는 소련의 마무리 공세 고리 작전(Operation Koltso)에 맞서려 애썼다. 점차 제6군 사단들은 외부와 연결된 비행장들을 내주며 후퇴했다. 히틀러와 만슈타인은 상황이 절망적임을 알면서도 파울루스에게 최대한 버티라고 독려했다. 그들의 희생이 소련군을 묶어두고 남방 전선 독일군 철수 시간을 벌어준다는 이유였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원수 계급장을 수여하며 항복을 거부하게 하려 했다. 지금까지 원수가 항복한 전례가 없으니 자결을 유도해 부대 사기를 북돋우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부대는 이미 넝마가 된 유령 같은 병사들로, 자발적으로 소련군에 투항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1943년 1월 31일, 일주일 전부터 실질적 지휘를 놓은 파울루스가 항복했다. 실제로는 우울증에 시달려 협상에 나서지도 못했고, 남은 것을 건지려는 부하 장교들이 항복을 진행했다. 붉은 군대는 10만 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다. 이들은 열악한 수용소로 보내졌고, 1943년 2월까지 1만 7천 명이 사망했다. 끝내 독일로 귀환한 이는 5,000명에 불과했다. 붉은 군대조차 이들을 제대로 먹일 여력이 없었다.

소련 선전에 의해 신화화된 이 승리는 즉각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독일엔 국가적 재앙이었고, 오랫동안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국방군은 붉은 군대를 상대로 26개월이나 더 버텼다. 이 전투만으로 전쟁의 향방이 완전히 뒤집힌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폐허의 거리에서, 수혈처럼 쏟아진 피와 제6군 포위를 위해 발휘된 기적 같은 노력 속에서 소련군은 최종 승리를 위한 잔혹한 교훈을 체득했다.

주요 참고 문헌 (일부)

  • 안토니 비버, 『스탈린그라드』, 1999.
  • 장 로페즈, 『스탈린그라드: 심연 끝의 전투』, 에코노미카, 2008.

더 알아보기

  • - 위대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다큐멘터리, DVD, TF1, 2005.
  • - 장 자크 아노 감독, 『스탈린그라드』. 영화, DVD, 파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