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냉전: 세계를 양분한 대립의 시대, 얄타 회담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1945년, 소련과 미국은 힘을 합쳐 나치 독일을 격파했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도 잠시, 이 특이한 동맹은 빠르게 막을 내렸고, 국제적 긴장의 긴 시대가 시작되었다. 강대국들은 정면 충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방식으로 서로 맞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냉전 시대를 한눈에 조망한다.

얄타 회담, 1945

냉전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지금도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분단된 세계의 첫 번째 계기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독일군은 베를린 앞바두에서 소련군의 공세에 몰려 있었다.

연합국의 지도자들, 즉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소련의 요세프 스탈린은 흑해 연안의 휴양 도시 얄타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독일의 운명과 전후 유럽 질서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지도자들은 독일을 여러 개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하기로 하였으며, 소련 점령 지역 안에 완전히 들어가게 될 베를린 역시 구역별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지도자들은 표면적으로는 건설적으로 협력했지만, 스탈린이 처칠과 루스벨트와는 전혀 다른 전후 유럽 구상을 품고 있음은 분명했다. 붉은 군대가 동유럽에서 나치를 사실상 홀로 몰아냈다는 이유로, 스탈린은 자신이 이 지역 국가들에 대한 영향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기묘한 타협이 성립되었는데, 처칠과 루스벨트가 그 결과의 무게를 인식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불확실하다. 동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되, 공산주의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유럽을 덮은 철의 장막

전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옛 동맹국 간의 지속적인 협력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 질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스탈린은 일련의 공산 위성국가들을 만들기 위해 동유럽에 대한 자유로운 처사를 요구했고, 그 대가로 서유럽에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강력한 공산당이 성장하고 있었기에, 서방은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독일의 분단
  • "뇌 질환 때문에 더 잔인해진 스탈린"
  • 냉전의 시작
  • 제3제국과 독일 분단 사이

스탈린의 공격적인 패권 정치에 맞서,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 어디에서든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이른바 봉쇄(containment) 독트린이다.

1948년, 독일 내 미국·프랑스·영국 점령 지역은 서방의 이상에 따라 민주주의 국가인 독일연방공화국(FRG), 즉 서독으로 통합되었다. 1년 뒤 소련 점령 지역에는 공산주의 국가인 독일민주공화국(GDR), 즉 동독이 수립되면서 독일의 분단, 나아가 서방과 동구권의 분단이 완성되었다. 1961년에는 동독이 자유로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물리적으로 가르는 장벽까지 세웠다.

  • 미국, 베를린 장벽에 대해 문제 삼지 않다
  • 장벽의 붕괴

1950년 무렵 형성된 세계는 양극화되어 있었다. 즉, 두 개의 강대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한쪽은 미국의 "핵 우산" 아래 안전을 보장받고 NATO 군사 동맹으로 결속된 자유·자본주의 진영으로, 이곳에서는 1950~60년대에 걸쳐 폭넓은 복지 국가를 갖춘 안정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반대편에는 모스크바가 이끄는 공산주의 독재 국가들이 있었다. 소련의 공산 위성국들은 1955년부터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해 군사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국제 분쟁

미국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파괴를 통해 원자폭탄 사용 의지를 보여준 바 있었다. 소련은 1949년 첫 핵실험에 성공했고, 몇 년 후 양 초강대국은 더욱 파괴적인 무기인 수소폭탄을 잇달아 실험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미소 양국은 너무나 막대한 무기를 비축하여, 정면 충돌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상호 파괴로 이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군비 경쟁과 끊임없는 위기 분위기 속에서, 냉전 기간 내내 대규모 평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두 진영 모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기에, 여러 나라의 다양한 정치·군사 집단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경쟁했다. 이러한 대리 갈등은 주로 서방 진영에도, 공산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소위 제3세계 국가에서 벌어졌다.

  • 냉전 속 뜨거운 음악
  • 피그만 침공: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
  • 러시아 침공 이전부터 미국은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 공포 통치 이후
  • 베트남 전쟁의 저항가요
  • 베트남, 역사가 되지 않는 전쟁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국전쟁(미국은 남한을, 소련과 중국은 스탈린주의 북한을 지원)과 수에즈 위기(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소련은 아랍 국가들을 지원)가 있다.

거대한 지정학적 체스 게임

양 초강대국이 전 세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야 했기에, 냉전은 점점 더 복잡하고 대규모인 지정학적 체스 게임이 되어갔다. 조지 케넌과 헨리 키신저 같은 미국의 외교 전략가들은 이 분야의 달인이었다. 팽팽한 긴장 정치는 때때로 위험천만한 국면을 낳기도 했다. 키신저는 소련과의 세력 균형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중국을 제3의 초강대국으로 국제 무대에 끌어들였다. 또한 군비 경쟁을 추가로 제한하기 위한 협상(SALT)을 주도하기도 했다.

  • 조지 케넌, 배신당한 비전가
  • 핵전쟁 회의록
  • 데탕트의 설계자
  • 아시아 냉전의 최전선
  • 헨리 키신저의 외교 정책

그러나 상대적 긴장 완화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의 공산 혁명이 실패 위기에 처하자, 소련은 군대를 파병했고 이 전쟁은 길고 절망적인 소모전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미국이 무자헤딘에 집중적인 지원을 보낸 것도 한몫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수년간의 경제 침체와 잘못된 통치와 더불어, 1980년대 후반 공산 체제를 완전히 소진시켰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열렸고, 2년 후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장벽의 붕괴
  • 베를린 장벽 붕괴
  • 할리우드, 전쟁에 나서다
  • 냉전 (BBC History)
  • 냉전, 영상과 소리로 만나는 역사
  • 우주를 지배한 자들

냉전 아카이브에서 더 찾아보기

  •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 National Security Archive
  • Russian Archives Online
  • Bukovsky 아카이브 (대부분 러시아어, 번역 진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