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다. 여성의 해방을 기념하는 이날, 수 세기 동안 네덜란드 여성들은 독립심과 당찬 기개로 국제적으로 유명해왔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17세기 네덜란드 여성들이 남성에 못지않게 자주 법과 마주했다는 점이다.
가난이 낳은 도둑들
연구에 따르면 17세기 여성들은 범죄 면에서 당대 남성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가장 흔한 범죄는 재산범죄였다. 여성들은 남성에게 종속된 위치와 바다에 나간 남편의 부재로 인해 취약한 처지였다. 선원들의 급여는 가족에게 온전히 지급되지 않았고, 그 결과 많은 선원의 아내들이 가난에 시달렸다. 이들은 교회와 시 의회에 빈민 구호를 청할 수 있었고, 실제로 상당수 여성이 그렇게 했다. 여성의 67% 이상이 일시적으로 이러한 구호에 의존한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이 가난이 여성들이 절도, 주거침입, 강도, 장물 판매에 손을 대게 만든 원인이었다. 당시 이런 사건의 거의 절반이 여성에 의한 것이었으며, 주로 고용주, 고객 또는 지인을 상대로 범행이 이루어졌다.
여성이 폭력적인 강도 행위를 저지르는 일은 드물었지만, 몸싸움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로테르담의 싸움 기록부에 따르면 약 42%의 싸움 참여자가 여성이었다. 주로 사회 하층 출신이었던 이 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명예, 행동, 직업적 명예에 대한 험담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인도의 오물 문제 등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도 폭력으로 번질 수 있었다. 이때 냄비나 항아리 같은 도구도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명예가 곧 전부였던 시대
현대 서구 사회에서 개인의 책임, 죄책감, 양심이 중심이라면, 17세기에는 평판과 공적·성적 명예, 예절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톨릭에서 개신교로의 전환과 함께 결혼은 성사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시 의회가 혼인 문제를 관할하게 되면서 혼외의 모든 형태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한번 '타락한' 여성은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고 반복적으로 체포될 가능성도 컸다. 추잡한 행동은 당사자의 평판에 악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이웃, 동네, 나아가 도시 전체의 이미지까지 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가족, 이웃, 교회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성범죄는 여성 범죄 중 두 번째로 많은 항목이 되었다. 매춘이 문제라기보다, 실제로 가장 많은 처벌을 받은 범죄는 혼전 성관계와 간통이었다. 17세기 간통죄자의 65% 이상이 여성이었으며, 흔히 기혼 여성이 독신 남성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형태였다. 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선원의 아내들은 몇 년씩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고, 남편이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남편의 공식적인 사망 확인서를 받기 전까지 재혼할 수 없었다. 확인서를 받는 데 몇 년이 걸리거나, 때로는 영원히 오지 않기도 했다.
형사 재판의 실상
여성들이 체포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기록들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부 사건에서는 현행범으로 붙잡혔지만, 대부분은 신고를 통해 발각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웃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네의 평판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달려 있었고, 누군가 제대로 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모두에게 불이익이 돌아갔다. 추잡한 행위가 의심되면 이웃뿐 아니라 친척이나 목사도 집정관에게 신고할 수 있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들킬 위험이 더 컸다. 주변에서 그녀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했고, 임신 가능성까지 겹치면 '저지른 죄'를 숨기기가 더욱 어려웠다.
기소 내용은 범죄적 생활 방식을 보여주는 일련의 혐의 목록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도둑과 매춘부의 경우 그러했다. 이들은 재판에서 가난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교화소에서의 노역, 교수대에 세워진 공개적 굴욕, 혹은 장기간의 추방이 그 예였다. 반면 싸움을 벌인 여성들은 대체로 훈계나 가벼운 처벌로 마무리되었다. 폭력은 대체로 단발성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영아 살해
거의 여성만이 저지른 범죄는 영아 살해였다. 여성의 성적 명예가 극도로 중요시되던 시절, 미혼 여성이 아기를 낳는 것은 큰 스캔들이었다. 그래서 미혼 여성들은 임신 사실을 숨긴 채 몰래 출산한 뒤 아기를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로테르담에서는 절박한 어머니들이 자신의 치부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라며 아기를 마스 강에 던져 넣는 일이 적지 않았다.
영아 살해는 여성이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범죄였다. 형구에 묶어 교살하는 방식이었으며, 때로는 그 전에 손을 절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이 이 극형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산모가 살아 있는 아기를 고의로 죽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백 없이는 이를 증명하기가 매우 어려워, 대부분의 여성은 첫 아기를 방임한 죄로 교수대 세우기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감경 사유
용의자는 그들을 보증해 주는 사람들 덕분에 무죄가 될 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속아 넘어간 아내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간통한 남편을 다시 받아들이고 용서하면 판사가 남편을 석방해 주었다. 이 여성들에게는 배신 자체보다 공개적인 굴욕과 소득 상실이 더 절박한 문제였던 것이다.
여성이 초범으로 체포되거나 억울하게 기소되면, 이웃들이 법정 앞에서 그녀의 평판과 도덕성을 보증하는 일이 흔했다. 또한 법원이 여성을 가족의 감독 하에 맡겨 중형을 피하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실제로 암스테르담의 얀예는 남편이 동인도에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 집에 유폐되는 조건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남편은 이미 6년째 집을 비운 상태였다.
17세기 네덜란드 여성들이 세계 다른 지역의 여성들에 비해 매우 독립적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는 이념적 페미니즘이라기보다 주로 실용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시 의회는 가난한 여성과 그 가족을 부양하는 비용을 지불하는 것보다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여성을 선호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