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들이 런던 도심에서 로마 시대의 문자판(라이팅 태블릿)을 발굴했습니다. 런던 고고학 박물관(MOLA)이 올여름 이 소식을 공식 발표했으며, 이번에 확인된 필사 문서들은 지금까지 영국 땅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종이를 쓰듯 왁스를 입힌 나무판을 활용했습니다. 메모, 청구서, 편지, 법률 문서는 물론, "이 물건을 카툴루스네 집 맞은편에 사는 통목공 유니우스에게 전해 줘" 같은 일상적인 낙서까지 남겼습니다. 아이패드 크기의 이 판들은 그동안 런던에서 19점만 발견되었지만, 이번 조사로 405점이 추가되었고 그중 87점의 내용이 해독되었습니다. 이 문서들은 기원 초반 수십 년간 로마령 브리타니아에서 어떤 삶이 펼쳐졌는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발견된 문자판을 소개하는 블룸버그(Bloomberg)의 영어 유튜브 영상도 함께 공개되었습니다.
런던 한복판의 건설 현장에서
문자판이 발굴된 곳은 런던의 금융 심장부인 퀸 빅토리아 스트리트(Queen Victoria Street)로, 금융 정보 기업 블룸버그의 새 사옥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던 부지입니다. 공사에 앞서 거대한 굴착 현장에 대한 고고학 조사가 먼저 진행되었고, 발굴 면적은 1.2헥타르에 달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가죽 신발과 보석을 비롯한 수천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그중에는 가장 초기 런던 주민들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한 문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발굴 작업은 2014년에 마무리되었고, 런던 고고학 박물관(MOLA)은 조사 성과를 담은 단행본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는 읽을 수 있는 87점의 문자판 번역문이 역사적 배경 설명과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이 문서들은 '블룸버그 태블릿(Bloomberg Tablets)'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가장 오래된 '런던' 기록
문자판에는 당시 살던 약 100명의 이름과 직업이 적혀 있습니다. 항아리나 나무통을 만들던 통목공(cooper), 양조업자, 판사, 군인은 물론 노예와 해방노예의 이름도 확인됩니다. 이를 통해 당시 런던 인구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주민 대부분은 상인과 군인이었고, 상당수가 갈리아(오늘날 프랑스)와 라인 강 유역 출신이었습니다. 대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런던을 무역의 중심지로 묘사했는데, 이제 무역 계약서와 급여 명세서라는 확실한 증거가 마련된 셈입니다.
특히 주목할 발견은 서기 65~80년으로 추정되는, 런던의 로마 시대 이름 '런디니움(Londinium)'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s)』에 나오는 언급보다도 앞선 것입니다. 숫자와 알파벳을 연습한 흔적이 남은 문자판도 발견되어, 당시 학교가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최초의 문서로 평가받습니다.
밀랍에 새겨진 글자
2000년 세월을 견딘 이 문자판은 검게 그을린 밀랍을 채운 나무틀이었습니다. 철·청동·상아로 만든 필기 도구 '스타일러스(stylus)'로 밀랍 위에 글자를 새기는 방식이었습니다. 밀랍은 오랜 세월에 부식되었지만, 스타일러스가 그 아래 나무에 누른 흔적이 남아 있어 일부 해독이 가능했습니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새 글을 쓰려고 기존 글자를 지우고 덧쓰는 경우가 많아 해독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울프슨 칼리지의 로저 톰린(Roger Tomlin) 박사는 은퇴한 고전학자이자 라틴어 필사 문서 전문가입니다. 그는 87점의 문자판을 해독하기 위해 특수 광원으로 촬영해 각인의 요철을 뚜렷하게 드러낸 뒤 분석에 착수했고, 텍스트 하나를 푸는 데 때로는 일주일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로마령 브리타니아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과, 파편적인 유물에서 라틴어 텍스트를 읽고 복원해 온 풍부한 경험이 해독 작업의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진흙이 지켜낸 유물
나무 유물은 보통 땅속에서 좀처럼 남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자판들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비결은 월브룩(Walbrook) 강의 축축한 진흙이었습니다. 로마 시대 런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다 중세에 지하로 묻힌 이 강의 진흙층에 문자판들이 잠겨 있었던 것입니다. 진흙이 산소의 접근을 차단해 부패를 막았고, 덕분에 완벽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발굴 후에는 유물들을 정성껏 세척하고 동결건조 처리해 안정화했습니다.
2017년 가을에는 이번 발굴에서 나온 유물 700점이 새로 지어지는 블룸버그 빌딩에서 일반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참고 자료
- Roger S.O. Tomlin(2016), 『Roman London's First Voices: Writing Tablets from the Bloomberg Excavations, 2010–14』, MOLA Monograph Series 72, 309쪽, ISBN 978-1-907586-40-8
- 영국 최고(最古) 필사 문서 공개 (MOLA)
- Bloomberg tablets roman notepads London (Science News)
- Ancient Roman IOUs Found Beneath Bloomberg's New London HQ (National Geograph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