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1911년 10월 29일, '황색 저널리즘의 아버지' 조셉 퓰리처 별세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는 '악마적'이라 불릴 만큼 강렬한 기질과 남다른 근면함으로 일찌감치 노동자로서, 기자로서, 그리고 훗날 신문 발행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창시자로도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St. Louis Post-Dispatch)와 뉴욕 월드(New York World)를 명성과 수익을 모두 갖춘 신문으로 키워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제정한 인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퓰리처의 생애

조셉 퓰리처는 1847년 4월 10일 헝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식 많은 가정의 아이였지만, 성인까지 살아남은 것은 그와 형제 단 둘뿐이었습니다.

1853년 아버지가 곡물 무역업에서 은퇴하면서 가족은 부다페스트로 이주했습니다. 아이들은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익혔습니다. 조셉이 열한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사업가와 재혼했습니다. 열일곱 살이 된 그는 홀로 서기로 결심합니다.

1911년 10월 29일,  황색 저널리즘의 아버지  조셉 퓰리처 별세

17세부터 그는 오스트리아군, 프랑스 외인부대, 인도 주둔 영국군에 차례로 입대를 시도했지만, 허약한 체격과 어린 나이 때문에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마침내 18세에 미국 링컨 기병대(Lincoln Cavalry)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고, 1865년 6월 5일 명예 제대로 짧은 군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1867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이듬해인 1868년 독일어 신문 '베스트리헤 포스트(Westliche Post)'가 그에게 기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직업에 온몸을 바쳤고, 하루 16시간씩 일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공화당에 입당한 그는 1869년, 마땅한 후보가 없다는 이유로 미주리 주 의회 의원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선거에서의 승리는 인상적이었지만, 당원들 모두 젊은 퓰리처가 겨우 22살이라 법이 정한 최소 연령에도 미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퓰리처는 공화당을 떠나 민주당 진영으로 기울었습니다.

퓰리처와 저널리즘

퓰리처는 정치를 사랑했지만, 진정한 열정은 저널리즘이었습니다. 1872년 베스트리헤 포스트의 편집장 자리를 제안받자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수락했습니다.

1878년에는 경매에서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St. Louis Dispatch)를 2,500달러에 매입했습니다. 이후 포스트의 공동 소유주와 합의하여 두 신문을 하나로 통합했고, 1878년 12월 12일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1911년 10월 29일,  황색 저널리즘의 아버지  조셉 퓰리처 별세

열정적인 기자였던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일했으며, 세인트루이스에 만연한 부조리라면 어떤 것이든 과감히 파헤쳤습니다. 탈세자와 도박꾼을 추적하고 보험 사기를 폭로했으며, 독점기업과 은행가, 부패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대가로 수많은 원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1880년대 초 그는 뉴욕 월드 신문을 인수했고, 1890년에는 이 신문의 사옥으로 16층짜리 건물을 세웠습니다. 월드는 탐사 보도와 깊이 있는 취재 저널리즘으로 명성을 얻으며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정확하게! 간결하게! 정확하게!"

퓰리처는 좌우명 "정확하게! 간결하게! 정확하게!(Accuracy! Conciseness! Accuracy!)"를 충실히 지키며, 사실을 담백하게 전하는 것이 올바른 보도 방식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1895년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가 경쟁 신문 뉴욕 저널(New York Journal)을 인수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판매 부수를 극대화하기 위해 퓰리처와 허스트는 비현실적인 기사를 실고, 피가 묻어나는 듯한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내걸었으며,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수많은 사진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오늘날 '황색 저널리즘'이라 부르는 스타일에 손을 댄 것입니다.

1911년 10월 29일,  황색 저널리즘의 아버지  조셉 퓰리처 별세

허스트와의 치열한 신경전을 수년간 이어온 끝에, 퓰리처는 드디어 이런 종류의 저널리즘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사실만을 보도하는 길로 돌아섰습니다.

1911년 10월 29일, 그는 자신의 요트 갑판 위에서 심부전으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브롱크스의 우들론 묘지(Woodlawn Cemetery)에 안장되었습니다.

퓰리처상

1911년 10월 29일,  황색 저널리즘의 아버지  조셉 퓰리처 별세

유언장에 명시된 대로 퓰리처상은 1917년 처음 수여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상은 인쇄 저널리즘 분야의 최고 영예로 여겨지며, 같은 이름의 문학상 역시 중요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설립 유증에 따라 최우수 보도, 기사, 만평 등 저널리즘 관련 부문 8개와 예술·문학 부문 4개의 상이 마련되었으며, 현재는 부문이 더욱 확대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