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베를린으로 들어가는 것은 동독 주민 모두의 꿈이었다. 동구권 전역에서 사람들은 감시탑과 훗날 세워진 콘크리트 장벽 너머에 비상한 번영과 부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 속 서베를린은 결코 꿈의 도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악몽에 가까운 곳이었다.
유명한 베를린 봉쇄가 끝난 후, 연합국 통치하의 서베를린의 실제 상황은 어땠을까? 놀랍게도 극도로 단조로웠다. 이 도시가 초강대국 간 대립의 정치적 쟁점으로 남아 있는 동안에야 모두의 관심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소련이 마침내 물러선 뒤 드러난 진실은, 서베를린이 공산주의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도달하려면 140km에 달하는 적대적인 영토를 통과해야 했고, 두 차례의 국경 검문을 거쳐야 했다.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괴롭힘과 위험이 따랐다.

철저한 검문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독일에서 서베를린으로 나가려면 무려 두 번이나 검문을 거쳐야 했으니까. 1972년 포츠담의 국경 통과 지점 (사진: Bundesarchiv, Bild 183-L0331-0009 / Reiche, Hartmut / CC-BY-SA 3.0)
처음부터 옛 수도 베를린은 연합군의 융단폭격을 생생히 기억하는 폐허가 된 황폐한 도시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점령군들은 도시를 더욱 짓밟았다. 건물을 해체하고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약탈해 갔다. 그중에서도 프랑스가 가장 앞섰다고 전해진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서도 거리 곳곳에는 여전히 7,500만 입방미터에 달하는 잔해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새로 수립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서베를린과 아무런 인연을 맺고 싶어 하지 않았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도시의 서부 절반이 서독에 편입된 것도 아니었다. 서베를린은 여전히 기묘한 지위의 점령지 월경지(엔클레이브)로 남아 있었다.

전쟁 직후 몇 년간 베를린의 모습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대기업들이었다. 주요 기업들은 이런 조건에서는 영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잇달아 도시를 떠났다. 전쟁 직후 서베를린에서 철수한 대형 공장만 150개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AEG, 도이체 카벨베르케, 빈터스할 AG, 크노르브렘제, 잘츠데트푸르트 AG, 그레츠 AG, 지멘스 등 굴지의 기업들이 속한 공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베를린 지도
1949년 서베를린의 산업 생산량은 전쟁 전 수준의 5분의 1로 곤두박질쳤다. 일부 산업은 더 참혹한 몰락을 겪었다. 기계 생산은 무려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독일 정부가 구 수도에는 단 하나의 발주도 넘겨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파산하는 공장은 계속 늘어만 갔다.
『섬: 서베를린의 역사 1948~1990』의 저자 빌프리드 로트(Wilfried Rott)에 따르면, 우편·통신 당국은 어떤 핑계든 내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안전 문제와 납기가 걸림돌이 되었고, 또 언제나 "시간과 담당 서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51쪽). 시장의 직접적인 탄원도, 서독 국민들을 향한 간절한 호소도 헛수고였다. 정치인과 사업가는 물론이고 예술가조차 서베를린으로 오기를 꺼렸다.
그 결과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로트의 기록에 따르면 1949년 여름 서베를린의 경제 상황은 "악몽, 파산, 재앙"으로 요약되었다. 도시 곳곳에서 극심한 빈곤의 흔적이 드러났다.
실업자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48년 5만 명에서 1949년 4월에는 15만 명, 같은 해 12월에는 무려 28만 7천 명에 달했다. 서베를린 주민 4명 중 1명이 실업 상태에 빠진 것이다. 유럽 어느 나라도 최악의 경제 위기 시기에 이런 상황을 겪지 않았다!
노동 사무소 앞에는 일자리를 내주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킬로미터에 달하는 줄이 늘어섰다. 그런 와중에도 수천 명의 동독 주민들은 번영과 더 나은 삶을 찾아 불법적으로 서베를린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만큼 크게 빗나간 선택은 없었던 셈이다…
출처:
- Wilfried Rott, Wyspa. Historia Zachodniego Berlina 1948–1990(섬: 서베를린의 역사 1948~1990), 폴란드 학술출판사 PWN,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