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때에도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묘하고도 흥미로운 장난을 치곤 합니다. 150년에서 20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를 두고 비교할 때(역사학에서 이 정도 기간은 사실 그리 긴 시간으로 치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학자들조차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평행선과 공통점들이 존재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1854년 그리스 콜레라 유행의 비교가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물론 1854년의 현실이 2020년에 그대로 반복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의 팬데믹은 문자 그대로 지구 전체가 직면한 문제이니까요. 하지만 국가의 대응 방식, 언론의 보도 태도, 정치적 음모 등에서 드러나는 유사성은 두 시대를 놀랍도록 정교하게 연결해 줍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디오니시스 엘렙테라토스(Dionysis Eleftheratos)의 원전 자료가 풍부한 저서 『역사를 비스듬히 바라보며』(Topos 출판사)에서 발췌한 특징적인 구절들입니다. 166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의 '그리스' 편이 1854년 콜레라 유행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들입니다.
아테네를 초토화한 외래 전염병
19세기 중반, 당시 걸음마 단계였던 그리스 국가의 수도 아테네에는 약 3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콜레라는 이 가운데 3천 명, 즉 인구의 10%를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지난 세기의 기준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저서에 따르면 "콜레라의 병기는 프랑스 점령군 소속 병력들에 의해 피레우스에 처음 상륙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합니다.

동맹군에 붙은 '점령'이라는 명칭에 독자 여러분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당시 한창이던 크림 전쟁을 틈타 주권국 그리스를 사실상 '장악'했습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 게릴라 부대들은 미수복 지역(당시 오스만 제국 영토)으로 쏟아져 들어가 이 지역들을 점령하려 했는데, 문제는 오스만 제국이 크림 전선에서 영·프 동맹과 함께 러시아에 맞서 싸우던 동맹국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현상을 막기 위해 동맹국은 피레우스를 사실상 점령했습니다.
결국 콜레라는 프랑스 군단 내에서 처음 관찰되었으며, 순수하게 외부에서 유입된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현상은 처음부터 당시 정부(1854년 5월 취임한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 총리)에 의해 과소평가되었습니다. 리가스 팔라미디스 내무장관이 전국의 현(縣) 총독에게 보낸 공문서가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팔라메데스 장관은 이렇게 썼습니다. "총독 귀하께 감사와 함께 알려드립니다. 유행성 콜레라가 상당히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라건대 머지않아 이 재앙의 고통이 완전히 종식되었음을 선언할 수 있기를." 이 글이 쓰인 때는 1854년 10월경이었습니다.
즉, 정부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6월에 처음 나타난 콜레라는 이미 충분히 처리되었고 완벽히 통제되었으며,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친영파 언론은 이 견해를 받아들여 끊임없이 확산시켰습니다. 신문 '아티나(Athina)'의 지면을 통해 세상은 유행병이 국가 당국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으며, 피레우스는 조금의 문제도 겪지 않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됩니다.
실제로 7월에는 이 신문이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아테네와 피레우스 간 교통 차단 조치는 완전히 불필요할뿐더러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디오니시스 엘렙테라토스가 언급했듯이 '아티나'는 "무수히 많은 상업·산업 이익이 파괴되는 헤아릴 수 없는 손실에 대해 성숙하게 고민하라"며 정부에 호소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생명 보호보다 무역과 경제 활동이 더 가치 있다는 논리는, 그때도 이미 존재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피레우스에서 질병은 '처리'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였을까요? '해결책'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 나라 최대 항구가 텅 비어버린 것입니다. 책에 따르면 피레우스에는 빈곤한 몇십 가구만 남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시로스, 스페체스, 인근의 이기나 같은 섬으로 피난했습니다. 특히 이기나에서는 토착 주민들이 피레우스 '피난민'들이 도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까지 던졌다고 합니다.
콜레라, 아테네를 '침공'하고 초토화하다
그렇게 피레우스에서 질병이 '처리'된 것처럼 보였지만, 결정적인 세부 사항들은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국왕 오톤은 개인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콜레라가 피레우스의 프랑스군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그들의 지도자들은 밤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몰래 던져 넣어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으로 이를 부지런히 숨겼다."

또한 아테네의 의사들은 명백한 위생상의 이유로 아테네와 피레우스 간 통행을 차단하는 '특별 구역'이 설정되지 않은 점을 부정적으로 지적했습니다. 더욱이 의료계는 두 가지 사태가 극도로 위험하다고 규정했습니다. 피레우스 검역 시행이 늦어진 점, 그리고 잦은 검역 위반이 관찰된 점입니다(이 모든 것이 무언가를 연상시킨다면...).
유행병은 1854년 9월 아테네에서 '발생'했고, 첫 환자는 리시스트라투스 거리에서 당국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조차 이 현상은 과소평가되었습니다. 앞서 보았듯 내무장관은 유행병이 완전히 통제되었다며 서둘러 전국 총독들을 안심시켰고, 친동맹파 언론은 '모든 것이 순조롭다'는 정보 전달을 자청했습니다. 10월 27일 수요일자 '아티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일일 환자 수는 너무 적어 논할 가치조차 없다. 다만 주민들은 식이 지침을 계속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요컨대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 역시 아마 무언가를 연상시켜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사태는 친동맹파 언론이 퍼뜨린 정부의 신화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불과 15~20일 만에 유행병은 수도를 무자비하게 덮쳤습니다. '아티나'는 더 이상 진실을 숨길 수 없어 11월 11일자로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어제와 오늘, 잔혹한 콜레라가 매우 급속히 확산되어 주민들을 거의 쓰러뜨렸다." 신문은 심지어 야채와 포도주 같은 품목이 여전히 시장에서 팔리고 있던 사실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중환자실(ICU)이란 없었습니다. 병원의 상황은 절박했습니다(오늘날의 상황이 이를 연상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테네 역사 연구가이자 작가인 기안니스 카이로필라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늘날 마크리기안니스 지역에 있던 군 병원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넓은 병실에 더 많은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침대들이 서로 딱 붙게 배치되었다. 일부 환자(주로 군인)는 아예 바닥에 눕혀졌고, 주변에는 쓰레기가 가득했다."
패닉에 빠진 아테네 시민들은 도시 교외로, 주로 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당시에는 파티시아조차 교외, 아니 시골 별장 지역이었습니다). 결국 인구의 3분의 1만이 아테네에 남았습니다. 이오안니스 코니아리스 시장은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고, 수많은 상점이 폐업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 중 상당수는 콜레라가 유입된 바로 그 피레우스로조차 '이주'했습니다. 당국이 멋쩍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믿기 힘든 상황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민원에 따르면 콜레라 사망자를 위해 판 구덩이들은 너무 얕았고, 이는 커다란 공중보건 문제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해외와의 비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아티나'는 그리스에서는 왜 환자의 10%만 치유되는 반면 유럽에서는 그 비율이 48%에 달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답은 명백했습니다. 건국 첫날부터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던 그리스 국가는 주민들에게 최소한의 효과적인 보건 보호조차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20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결국 콜레라는 1854년 12월에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 아테네를 초토화하고 나라의 사회·경제적 '몸통'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온 가족이 뿌리째 뽑혔고, 사람들은 무력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런데도 피레우스와 아테네에 유행병을 가져온 동맹국 점령군은 그리스 땅 위에서 또 3년간 미동도 없이 머물렀고, 1857년 2월, 크림 전쟁에서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야 비로소 철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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