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의 성생활이 금기와 금지로 가득했다는 사실은 당시 알려진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비잔틴 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고대 세계의 다소 느슨했던 도덕관념을, 제국의 논리에 따르면, 바로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벌과 금지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침실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의학과 화학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에 이런 방법들은 실패로 끝나기 일쑤였고, 오늘날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많은 이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지금부터 비잔틴의 기이한 성 관습들을 살펴보자.
비잔틴 비아그라
발기부전의 해결책을 찾는 일은 그때부터 남자들의 숙제였던 모양이다. 한동안 그들은 만드라케(맨드레이크)라는 식물에서 답을 찾았다고 믿었다. 만드라케는 고대부터 신비주의적 식물로 사랑받으며 수많은 미신과 효능 설화와 함께해 왔다. 어떤 이들은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부적으로 사용했고, 또 어떤 이들은 뿌리를 뽑으면 사람을 미치게 만들 비명을 지른다고 믿어 뽑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약초 비아그라로 쓰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황제 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의 사례도 기록에 남아 있다. 그는 발기를 위해 생식기에 각종 연고를 발랐고, 때로는 특별한 음식에 약재를 넣어 먹기도 했다. 참새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반면 중세 의사 오리바시우스는 이런 고민이 있는 이들에게 후추와 질산을 생식기에 문지르고, 부드러운 침대에서 잠을 자며, "음란한 글을 읽으라"고 조언했다. 당시 기준으로 그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말이다.
동물과의 성행위?
상상하지도 말자. 당시에도 수간(獸姦)은 일종의 변태 행위로 간주되었고, 순한 동물을 골라 병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들에게 법은 매우 엄격했다.
국가 입장에서 이른바 '목동'들은 도덕적으로 오염된 존재로 여겨졌고, 실로 혹독한 형벌이 내려졌다. 남성에게는 거세가, 여성에게는 검으로 죽임이 규정되어 있었지만, 때로는 목숨은 살려주는 대신 자유를 빼앗는 형벌로 대체되기도 했다. 감옥에 가둔다는 뜻이 아니라, 평생 노예로 삼았다는 것이다.

아들을 잉태하는 법
여기서부터는 더욱 기괴해진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이 믿고 사용하는 허브 요법에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성관계 중 충실히 따라야 하는 하나의 '전술'까지 발전시켰는데, 물론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었다.
이 방법에 따르면 성교는 오른쪽을 향해 이루어져야 했다. 당시에는 남자 아이는 오른쪽 고환에서, 여자 아이는 왼쪽 고환에서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목련과 연고를 활용한 다른 처방들도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너무 역겹고 명백히 건강에 해로워 두드러진다. 그 처방의 내용은? 아이가 남자가 되려면 남편이 성관계 전에 토끼 피를 자신의 몸에 있는 점에 발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처방이다.
피임약
피임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끔찍한 것들의 목록도 있다. 개구리 뇌와 토끼 털부터 시작해서, 상대적으로 덜 끔찍하지만 똑같이 무용지물인 방법, 즉 성관계 전에 질에 박하(민트)를 넣는 것까지, 여성들이 견뎌야 했다.
일반적으로 특히 매춘부들은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해 매달 일련의 허브로 외음부를 씻었다고 전해진다.
낙태
신정(神政)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낙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를 잃게 하는 방법들은 존재했지만, 이런 일이 당국의 눈에 띄면 처벌은 매우 무거웠다.
교회는 낙태한 여성을 '살인자'로 규정하고 평생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 훗날에는 이 '형벌'이 10년 파문으로 완화되었다. 국가는 그녀를 추방했고, 그녀를 도운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처분을 받았다. 남편은 이 일이 자신의 허락 없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이혼할 권리가 있었다.
낙태 방법은 다양했다. 가장 흔한 것은 임산부의 배를 누르거나 무거운 추를 올려놓는 것이었다. 물론 각종 독약도 빠지지 않았는데, 이것이 종종 여성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곤 했다.

'처녀'를 만드는 방법
당시 결혼 전에 성관계를 경험한 여성이 시집가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친척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처녀막 재건 수술'이 아니라 여러 가지 궁여지책으로 상황을 '수습'하려고 달려들곤 했다.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는 치유 및 소독 효과가 있는 허브인 심피툼(꿀풀)을 녹여 외음부에 바르는 것이었다. 월계수 잎을 데운 후 비슷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간통
금지된 관계에 빠진 이들에게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처벌이 내려졌다. 물론 사회가 깊은 가부장제였던 만큼 처벌은 항상 여성에게 더 가혹했다. 그러나 886년부터 912년까지 재위한 현명한 레오(레오 6세)가 방대한 입법 작업으로 이 분야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법률 중 하나는 이렇다. "아내의 간통을 알고도 용서한 남편은 채찍질을 당하고 유배되며, 간통한 남녀는 코가 잘린다."
수도원 수녀와 성관계를 가진 남자에게도 코 절단형이 규정되어 있었다. 수녀는 교회에 속한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 역시 간통이었던 것이다! 수녀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또 다른 법은 이렇다. "간통을 저지른 기혼 남성은 열두 번의 채찍질을 받고, 빈부를 불문하고 벌금을 낸다. 독신남은 여섯 번이다."
동시에 간통을 저지른 아내는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그녀의 재산은 자동으로 바람핀 남편의 손에 넘어갔다.
흥미로운 점은 '뿔난 남편'(케라타스)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시기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비잔틴인들은 황소와 숫양 같은 뿔 달린 동물들을 다소 둔하고 매우 관대하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바람피운 남편을 이렇게 비유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멍청해서 아내가 바람피우는 줄도 몰랐거나, 아니면 아내가 '돌아다니는' 것을 너무나 관대하게 허용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